바울은 고전 8:1에서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고 말한다. 여기 '지식'도 '그노시스'이다. 베드로는 마지막 편지의 결론으로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당부한다. 그런데 여기 '지식'도 역시 '그노시스'다. 동일한 단어가 전혀 다른 뜻으로 다가온다.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우리가 그 안에서 자라가야 할 어떤 것이 된다.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지식은 구약 율법에 기반을 둔다. 즉 성경 지식임에도 이러한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고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겸손과 고난의 본을 보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우리를 구원하게 하고 성장하게 한다.
3절에서 '먼저 이것을 알지니'라고 시작하며, 17절에는 '미리 알았은즉' 즉 '프로기노스콘테'라는 동일한 '알다'라는 단어를 쓴다. 마지막으로 18절 역시 '그노세이(그노시스)'를 쓰고 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주님께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심을 기록하는데, 은혜만이 아니고 진리만이 아니라 은혜와 진리 둘 다 충만하심을 말씀하신다. 은혜는 우리가 체험해야 하는 것이고 진리는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요 8:32). 은혜에만 치중해도 안되고 진리에만 치중해도 안된다. 사실 이 둘은 뗄 수 없다. 우리가 체험하는 은혜는 진리에 기반을 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아니라 최면이 된다.
자유주의 운동이 일어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의 '앎'이 아닌 다른 지식을 추구함에 기인한다. 그래서 자유주의라는 틀 안에서 예수를 이해하려 하거나 성경을 이해하려는 것은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성을 떠나 '오직 믿음'을 추구하면 정작 그 믿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수 있고, 이것 역시 '억지로 풀'게 될 수 있다.
주님, 주께서 오픈하시고 계시하셔야만 주를 알 수 있고 그 지식 안에서 자랄 수 있습니다. 오늘 더 보이시고, 더 생각하게 하시며, 더 배우게 하시고, 굳건함으로 추구하게 하소서. 주의 이끄심만이 나의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