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에 ‘주를 위하여’라는 구절이 몇 있지만 대표적으로 로마서 14장에서 찾을 수 있다.  6절은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고 말씀하고 또 8절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말씀한다.

 

오늘 슥 7장 말씀에 벧엘 백성들이 금식을 계속해야 할지에 대한 물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해 칠십 년 동안 금식하고 애통해온 그 행위가 ‘나를 위하여, 곧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라고 되물으신다.  70년 동안이나 지켜온 의식의 대상이 여호와 하나님이셔야 했지만 결국은 자신들을 위한 종교적 행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흥미롭다.  주님께서는 6절에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시는데, 즉 벧엘 백성들의 금식이 종교적인 의식을 넘어설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더 많은 시간 즉 ‘먹고 마실 때’ 역시 주님과는 상관 없었음을 드러내신다.  그래서 앞의 롬 14:6에는 ‘먹지 않는’ 것과 동시에 ‘먹는’ 것 역시 주를 위하여야 함을 말씀하고 더 나아가서 8절은 사는 것 뿐만 아니라 죽는 것, 또 반대로 죽는 것 뿐만 아니라 사는 것 역시 주를 위하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주의 소유임을 밝히신다.

 

사실 우리가 뭔가 주를 위해 한다고 하고 또 주를 위해 산다는 것은 많은 경우 착각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모든 것이 주의 은혜다.  나의 선행에는 정말 온전히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그 안에 숨겨진 자아의 여러 모습들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를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는 내 존재 자체를 받으실 만한 것으로 여기신다.

 

주님, 제가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죽을 수 있는 것은 저의 정체성을 바꾸셨기 때문임을 압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순종의 삶, 주와 동행하는 삶, 친밀한 관계가 오늘 삶의 여러 부분에서 적용되어지기 원합니다.  선교나 구제나 성도들간의 교제가 주님과 상관없는 우리들만의 열심으로 끝나지 않게 하소서.  우리들의 삶 자체가 주께서 받으실 만한 영적 예배가 되게 하소서.  육신이 건강해도 주를 위하고, 혹은 병들어도 주께서 택하시고 받으신 우리의 존재는 역시 주를 위함을 잊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