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의 상황이 어땠을지 모르지만 오늘 말씀은 소망으로 가득차 있다.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차이를 보여주는 구절이 두 개 있는데, 먼저 1절은 이방인들에 대해 ‘여호와의 말씀이 하드락 땅에 내리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라고 시작한다.  원어에는 ‘여호와의 말씀의 부담이 (혹은 무게가)’ 라고 되어 있는데, 그냥 ‘여호와의 말씀’이 아니라 그 ‘무게’가 이방을 짖누름을 의미한다.  반면에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사람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봄이니라’고 말씀한다.

 

7절까지 이방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시다가 8절 부터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을 말씀하는데, 특히 12절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는 구절이 눈에 띤다.  영어로는 ‘prisoners of hope’이라고 번역되었고, 원어 역시 그렇게 되어 있다.  즉 ‘소망의 수감원들’ 혹은 ‘소망의 포로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포로’라는 단어 자체는 슬프고 원통하고 소망 없지만, ‘소망의 포로들’이라는 시적 표현을 씀으로 오히려 아름답게 들린다.

 

가끔 ‘prisoner of love’라는 말을 듣는데, 문자적으로는 ‘사랑의 포로’ 라는 의미겠지만, 그 느낌은 사랑에 빠져서 그 안에 갇혀 헤매이는, 아예 황홀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마찬가지로 ‘prisoners of hope’ 이라는 말 자체는 역설적이지만 갇혀 있음에도 소망을 잃지 않고 오히려 자유자들보다 소망이 충만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이 갇혀 있지만 소망이 넘칠 수 있던 것은 이방에게는 무게와 부담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품음으로 그들에게는 소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 8:34)’고 말씀하셨고, 진리이신 주님을 알 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8:32)’고 말씀하셨다.  십자가는 죄의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우리가 거기에 매여있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이와 더불어 바울은 현실에서는 아직도 우리가 육체라는 장막에 갇혀 있지만, 이제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 ( 2:20)’ 임을 분명히 한다.  삶의 무게는 분명 존재하지만, 그 안에서 ‘소망의 포로’로 살 수 있는 것은 이방에게는 무게와 부담이 되지만 우리에게는 자유함을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의 선포가 있기 때문이다.

 

주님, 말씀 때문에 짖눌리지 않게 하소서.  짖눌리더라도 영 안에서 결국 우리에게 치유를 주시고 해방을 주시는 주님의 말씀임을 기억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말게 하시고 그 무게를 느끼게 하소서.  그 부담을 감당케 하소서.  말씀의 위중함이 우리로 소망을 갖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분명하며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다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육체라는 장막에 갇히고 여러 상황 속에 갇힌 가운데에도 더 큰 소망을 품게 하소서.  그 소망이 오늘 싹이 나고 열매 맺기 원합니다.  주께서 보이신 것들이 드러나게 하소서.  주님께만 영광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