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서에서 유다라는 말은 21번 나오지만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고작 5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 더우기 지난 장 14절에서는 "내가 또 연합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꺾었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리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라고 기록하며 북이스라엘에 문제가 있음을 밝힌다. 722/721 BC에 앗수르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하고 598 BC에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가 멸망 당한 후 스가랴서는 다리오 왕에 의해 포로 귀환이 허락된 BC 520년부터 기록되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상황은 북이스라엘 멸망후 벌써 200년이 지났고, 이제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한 때다. 당시 사마리아에서는 앗수르와의 혼혈로 많은 부분에서 그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이제 마지막 남은 땅은 성전이 있던 자리, 그래서 재건될 수 있는 예루살렘 밖에는 소망이 없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 작고 힘없어 보이는 남은 자들에게 다시 '만군의 여호와'라고 계시하시며 그 주위 나라들이 아무리 에워싸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뜬히 지켜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요즘 기독교를 보는 것 같다. 많은 부분에서 무너지고 갈라지고 거짓된 것이 드러나고 세상의 세력 앞에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는 것 같다. 동성욕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리고 정치적인 대응에 대해서도 충돌을 보이거나 관심이 없다. 사회 전체의 가치관과 윤리성이 하락하는데도 속수무책 손을 놓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주님께서 살아계시고 이미 승리하셨음은 변함 없는 진리다. 이제 남은 유다 땅과 예루살렘은 주님께서 지키실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타락한 가치관과 원수의 궤계를 거뜬히 물리치시고 뒤엎으실 것이다.

10절은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라고 기록하는데 대부분 영번역에서는 '그를 바라보고' '나를 바라보고' 즉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예언으로 요 19:37에 기록되었다.

놀라운 것은 스가랴는 다시 ''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1절은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라 (원어는 다시 '말씀의 무게')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 라고 되어 있는데, 구약 마지막 부분에서 창조의 비밀을 다시 말씀해 주신다. 이 말씀에 따르면 우주가 생기기 이전 '공간'이라는 개념은 없던 것 같다. 그래서 '하늘을 펴'실 때 비로소 공간이 생기고, 공간이 생기자 시간의 개념 역시 발생한다. 그런데 우주라는 정말이지 너무도 놀랍게 광대한 공간을 펴신 목적은 바로 그 광활한 우주에 비해서는 너무도 작은 이 땅을 지으시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땅을 만드신 목적은 바로 사람을 땅에 두시고, 놀랍게도 그 사람 안에 ''을 창조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기록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감탄하고 놀라게 한다. 이 광활한 우주를 지으신 목적이 궁극적으로 사람 안에 영을 두기 위하신 거라니...! 그리고 10절 말씀과 같이 이 영을 통해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이 부어진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영을 두시고 그 영 안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심으로 ( 4:24) 은총을 얻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신다.

주님, 북이스라엘은 정체성을 잃어 버렸고, 남 유다 역시 이방 민족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그 가운데 남은 자들을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보내시고 회복의 역사를 이루심을 봅니다. 이러한 회복과 재건의 역사가 오늘 주님의 교회 안에 있게 하소서. 주께서 우리 안에 두신 영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성령이 온전히 거하시고 우리 마음과 몸이 주 앞으로 돌아오게 하소서. 주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다시 한번 묵상하는 하루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