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상으로는 스가랴서 후에 오는 느헤미야를 시작한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 (6절)’했고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 (7절)’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7절의 계명 율례 규례 등은 영어에서는 commandments, statutes, ordinances (혹 judgment) 등으로 번역했는데, NIV에서는 commands, decrees, laws 등으로 번역했다. 이러한 것들의 차이는 뭘까? 우선 계명 (commandments)은 십계명을 기본으로 한다. 이를 바탕으로 조금 더 세분화된 것이 율례 (statutes)이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있어서 좀 더 세부적으로 추가된 항목이다. 규례는 상황과 시대에 따라 더욱 추가된 것들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전체적으로 ‘율법’이라고 불렀다.
구약에서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으로 나오고, 이를 어기면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고, 8절 말씀처럼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을 것’임을 경고하셨다. 즉 이러한 계명 율례 규례 등은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들이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출 21:15, 개역)’ 혹은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3)’ 등의 명령을 문자 그대로 오늘도 따라할 수는 없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율법의 완성이고 마침이 되시는 주님께서 오셨기 때문에 주를 믿는 이들은 이러한 것들에서 완전히 자유하다. 그래서 ‘율법폐기론’이라는 말이 나온다. 문제는 많은 경우 ‘~론’ 혹은 ‘~주의’라고 할 때 발생한다.
갈 5:13에는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고 말씀한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얻은 자유함은 ‘육체의 기회를 삼’을 수 있을 만큼 진정 자유로운 것이다. 사도행전 15장에서는 결국 유대인 자신들도 하지 못한 것을 이방인들에게 짐 지우는 것이 옳지 않은 것임을 분명히 하고 할례를 포함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방인들에게 지우지 않을 것을 결정했다. 그래서 15장 20, 29절, 21장 25절 등에서 이방인들이 멀리할 것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 등으로 간단하게 끝낸다. 이 결정은 전통 유대교의 모든 율례나 절기나 종교적 의무에 대해 이방인들에게 완전 자유를 선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정은 매우 옳은 것이었고 또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했다.
(아래 내용은 예전에 나눈 것을 한번 더..)
율법에 대해서 신약은 복음서의 '폐하지 않는다'로 시작해서 '완전케 한다' '굳게 세운다' 그리고 결국 에베소서에는 폐하는 것으로 나온다. 율법으로는 도무지 해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 율법 자체를 성경에서 지우는 (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능력으로 결코 지킬 수도 완성할 수도 없는 것이므로 우리의 무능함을 알게하여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도구로 사용될 뿐이지, 그것을 지킴으로 우리가 의롭고 선해지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결론 짓는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 율법을 완전케 하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다. 즉 구약의 율법은 불완전했음을 말씀한다.
(롬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 율법 자체는 참되고 선하기 때문이다.
(롬 4: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 율법보다는 믿음에 의한 언약이 먼저임
(갈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엡 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아마도 율법폐기론이라는 말이 문제가 된 것은 구원파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그 어떤한 ‘~론’도 성경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 ‘율법폐기론’ 보다는 ‘성령을 따름 (갈 4, 5)’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것이다.
성령은 같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시기에 성령을 따름으로 율법의 요구는 충족되기 때문이다. 옛 계명은 ‘말라’가 많았다. 하지만 새 계명은 ‘하라’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적극적인 말씀이다. 지키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목적이 아닌 적극적인 행함으로 열매 맺는 것이 목적이다. 율법은 폐기되었지만 동시에 완성되었다. 우리의 능력만으로는 그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지만,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고 (롬 8:4)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한다 (갈 5:16). 우리가 이제 따를 계명은 ‘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다 (요이 1:6). 동성욕에 대해서는 힘을 다해 정죄하지만, 동성욕자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개를 촉구해야 하는 것이다. 오직 성령을 따라 행할 때만 가능하다.
주님, 주의 계명을 저버린 것에 대해 스가랴는 너무도 가슴 아파했고 슬퍼했음을 봅니다. 단지 무작정 계명을 지키는 것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한 것이기 때문임을 고백하는 스가랴를 보며 율법주의와 율법폐기론의 문제를 봅니다. 나의 마음을 성령께 향하게 하소서. 주께서 주신 이 자유함이 넘치게 하셔서 나로 오늘 주를 사랑하고 경외함으로 주와 동행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