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막 12:40, 눅 20:47)’ 것을 경계하셨다. 마 6:7에서는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고 말씀하시며 마치 기도를 길고 많이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처럼 말씀하셨다. 하지만 잘 보면 ‘외식으로’,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주문을 외우듯 이말 저말)’ 이라는 전제가 있다. 정작 주님께서는 습관적으로 새벽마다 아버지께 기도하고 또 죽으시기 전에는 밤새도록 피 땀을 흘려 기도하신 모습을 보이신다. 또 마가 다락방의 120 문도 역시 ‘오로지 기도에 힘 쓴 (행 1:14)’ 것을 본다.
성경에서 기도에 대해 많은 경우 우리의 필요를 놓고 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한다. 천부께서 이미 그의 자녀들의 필요를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구할 필요는 없고, 다만 예수의 이름 안에서 (요 14:14) 그의 뜻대로 (요일 5:14) 무엇이든 (요 14:14) 구할 것을 명하신다. 빌 4:19에는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말씀함으로 이미 우리 모든 쓸 것을 채우실 것을 약속하신다.
오늘 말씀 전개 과정을 보면 기도가 매우 중요한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잠시 ‘묵도 (4절)’ 한다. 왕의 질문에 대해 빨리 답변해야 했기에 매우 짧은 스치는 기도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짧디 짧은 기도의 배경에는 평소 그의 삶이 왕의 술 맡은 관원직 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 대해 전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평소 얼마나 이러한 기회에 대해 준비하고 있었는지 왕의 질문에 대해 그의 구하는 구체적인 요구 사항을 보면 알 수 있다. 기도는 짧게 했지만 이러한 답변은 그 이전 그의 기도의 생활을 보여준다. 사실 느헤미야 1장의 반 이상은 그의 기도이다.
특히 영적 지도자는 기도의 본을 보여야 하지만, 그것이 외식적인 것이 되어 버리면 종교적인 행위로 전락하게 된다. 무릎 꿇고 기도하는 행위가 정작 나의 요구 사항을 관철시키려는 노력이라면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없는 이방인의 기도가 되고 만다.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조차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위해 기도하셨다.
주님,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합니다. 기도가 부족한 저, 움직이려고만 하는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오늘 주와 함께 머물게 하소서. 머물고 나면 주께서 나를 보내실 것을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