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부터 등장하는 산발랏은 느헤미야 마지막 장인 13장까지도 그 이름이 계속 나온다.  거기에 그의 친척인 도비야 그리고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 아스돗 사람들 등이 느헤미야를 대적한다.  산발랏은 당시 사마리아 총독이라고 하는데,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려는 느헤미야에 위협을 느꼈던 것 같다.  총독으로서 자신은 왕의 권위를 부여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난 2 19절에는 느헤미야에게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라고 물었지만 느헤미야는 사실 왕의 조서를 가지고 왔다.  법적으로 하자가 없자 자신의 위치에 위협을 느낀 모양이다.  그래서 주위 몇몇 민족들과 더불어 느헤미야와 유다를 대적한다.  이에 비해 아라비아 게셈은 아마도 경제적인 이유로 느헤미야의 사역을 훼방한 것으로 보인다.  성벽이 완성되면 전에는 낼 필요없던 무역에 따른 세금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정치와 경제가 타협해서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한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느헤미야는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며 주님께 힘을 구하고 기도함으로 그들을 정죄한다.  이 사역은 느헤미야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느헤미야가 오기 전, 성벽이 불타 무너졌을 때는 주위 원수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사역이 시작되자 원수들은 바빠지기 시작한다.  원수와 화평을 맺으면 사는 것이 편하지만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삶을 산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원수들이 바빠지고 일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 4:3)’켜야 하지만, 이것은 타협하라는 말씀은 결코 아니다.  진리 수호와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할 때가 있다.  안타깝고 아쉬운 것은 이러한 대적이나 원수가 물론 그 배후는 악한 영이지만, 나타나는 면으로는 형제 자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도 마 10:36에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말씀하신 것 처럼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않는 이들은 원수의 쓰임을 받을 때가 있다. 

 

느헤미야의 일을 방해하는 이들은 그 주류가 사마리아 암몬 등이다.  이들은 원래 동족이었고 같은 줄기였다.  하지만 그들은 우상 숭배와 분리함으로 하나님의 하나되게 하심을 먼저 떠난 이들이다.  이들과는 화평이 불가능하다.  이들이 먼저 회개함으로 주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더우기 12절에서는 오히려 유다 사람들 조차 열번이나 ‘너희가 우리에게로 와야 하리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사역을 맡은 이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이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성육신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성육신은 죄의 모양은 ( 8:3, 2:8, 고전 9:22) 있으나 ‘죄는 없는 ( 4:15)’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 교회 안에서 자신의 권력을 주장하고 또 이권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들을 심판하소서.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모양은 있지만 정작 하나님의 생명과는 상관 없는 이들임을 압니다.  제 안에서도 권력이나 인기를 지양하고 또 더러운 이권을 기대하는 마음을 제거하시고 온전히 심판하소서.  오직 주님으로만 만족과 위안 삼게 하소서.  평안을 주셨지만 싸워야할 것에 대해서는 힘을 다해 싸울 수 있는 마음과 용기와 힘을 주소서.  오직 주님께 온전히 속함으로 원수를 대적하게 하소서.  틈들이 메꿔질 때 원수들이 바빠지는 것을 봅니다.  오늘 주의 몸된 교회 안의 틈을 메꾸시고 세상과 타협 없는 주님의 일을 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