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좀 분주했기도 했지만 오늘 말씀을 읽다가 칼빈의 TULIP에 대한 개인적인 비판, 개혁신학적 입장에서의 종말론, 그리고 그와는 반대로 소위 '세대주의' 등이 생각나서 글을 길게 쓰다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간단하게 나누는 것이 좋겠다고 느꼈다.
한 손으로 일하고 다른 한 손에는 무기를 들었던 느헤미야와 그 사역에 동참한 백성들의 모습에 소위 multi-tasking을 지나 지극히 현실적인 동시에 또한 역설적인 신앙의 자태가 보인다. 믿는다는 것이 간단한 문제라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복잡한 것은 상대적으로 영적인 것이 아닌 경우가 많지만 삶 자체가 그렇게 녹록하거나 간단하지가 않다.
세대주의적 종말론이 야기할 수 있는 문제점은 아마도 종말론이라는 것 자체가 염세주의나 허무주의 그리고 또 잘못하면 그에 대해 쾌락주의나 방종으로 빠질 수 있는 점 일텐데, 이러한 폐혜는 개인적으로도 경험한 것이지만 다른 이들도 현실과 신앙 사이에서 맞딱드리기 쉬운 그러한 문제라 생각한다.
그래서 소위 '건강한 종말론'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데, '극단적 세대주의'는 그 말 자체로도 문제가 있지만 세대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에게는 종말은 임박한 문제가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 같아 또한 못마땅한 느낌이 든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미 하지만 아직은 - already but not yet' 이라고 말하듯 현실에서 종말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임박한 종말 (어떻게 보면 어차피 인생 자체가 건강하게 살아도 100년 미만이니) 그리고 이 땅 전체에 일어나는 전체적 종말을 믿지만, 동시에 현실을 무시하지 않고 사는 것이겠다. 이것은 마치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현실과 타협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정말 그리스도가 사시고 내가 죽었다면 주님께서 언제 오시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될까...
(세대주의에 대한 비판을 인터넷에 많이 찾을 수 있는데, 영어의 dispensationalism을 '세대주의'로 번역한 것에 대한 아쉬움도 있다)
주님, 말씀에 따라 그 날이 언제일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오늘 이 하루 내 삶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 원합니다. 발은 땅에 두고 눈은 하늘을 향하는 오늘을 맺기 원합니다. 저는 참으로 주님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