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우리’이다.  13절까지 무려 19번이나 등장한다.  그래서 생명의 삶 해설도 ‘공동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에게 문제가 생길 때 지도자는 분노해야 한다.  느헤미야는 크게 노했다 (6).  하지만 노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을 강구해 나간다.  먼저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고 (9), 그 주신 율법을 상기시킨다 (10).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고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방안을 가지고 공동체를 살렸다.  아무리 성벽을 재건해도 그 안의 공동체가 파괴되면 그 수고가 허사가 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homo socies).  공동체적 존재다 (homo communitatis).  라틴어에 ‘bonum commune communitatis’ 라는 말이 있는데 ‘공동의 이익’ 즉 general welfare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말이 성경에는 ‘시민권’으로 쓰였다 ( 3:20).  이 땅의 시민권에도 권리와 의무가 동시에 존재하지만, 하늘 즉 천국의 시민권 역시 그냥 개인적인 권리를 누리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부분에 공동체적 복을 누리는 것이고 이것은 나눔을 통해 일어난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러한 공동체 의식을 많이 잃은 것 같다.  개인 구원에 대해서는 열심을 보이지만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 서로 나눠야할 것을 나누는 것에는 익숙하지 못하다.  개인주의적 구원은 휴거니 종말이니 십사만사천이니 하는 것에 대해 지나친 관심을 갖게 하지만 공동체적 구원은 주님의 다스림 아래 함께 하는 형제 자매들의 필요에 관심을 갖게 한다.  그래서 공동체에서 중요한 것이 대화이다 (homo communicans).  오늘 말씀은 백성이 느헤미야에게 말을 하고 느헤미야가 귀족과 민장들에게 말을 하고 또 그들이 느헤미야에게 말을 하고 나아가 전체 회중이 말을 하는 내용이다.  한 방향으로의 지시나 윽박지름이 아니라 지도자 느헤미야를 통한 공동체적 대화이다.

 

구원을 개인적인 것만으로 이해하면 기독교는 너무 이기적인 것이 된다.  물론 영적인 면에서는 내가 먼저 바로 서야하지만 개인 구원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교회는 공동체가 아닌, 각 지체들로 이루어진 주님의 몸이 아니라 그냥 멤버십 클럽이 되어 버리고 만다.  천국은 내가 ‘가는’ 곳이 아니라 이 땅에 ‘임하는’ 것이다.  그 시민권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

 

주님, 한 형제 한 자매를 귀하게 여기게 하소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얼마나 내 신앙이 자기 중심적이고, 얼마나 내 기도가 나만을 위한 기도였는지요..  이제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그 필요에 관심을 갖게 되기 원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서로가 지체임을 분명히 알게 하소서.  이러한 것이 단지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게 하소서.  일이 필요한 이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지체가 있게 하시고, 아픈 이들을 찾아가는 지체가 있게 하소서.  마음에 상처 받은 이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지체를 주시고, 진리에서 멀어져가는 이를 바로 세우는 지체도 허락하소서.  우리는 주님의 몸임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