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즉 공동체의 개념은 ‘ com 함께’의 개념이고 이것은 ‘communitatis 공동의’ ‘communicans 대화의’ 그리고 어제 답글을 달아주신 것 처럼 ‘communion’ 이다.  '성찬'을 의미하는 이 communion은 라틴어 communionem에서 왔고 이는 communis 에서 유래된 말로 상호 참여와 나눔을 의미한다.  그러고 보면 ‘성찬’은 거룩한 주님의 상이라는 개념이 먼저이기는 하지만 성도들의 공동 식사이며 이 식탁에 참여하는 자들은 모두가 다 동등하며 주 안에서 하나라는 뜻이 된다.  다시 문자적으로 보면 com (함께) 라는 단어와 unus (하나)라는 단어의 복합어이다.

 

이러한 개념에서 공산주의 communism이 나왔다.  공산주의는 문자적으로 또 이론적으로 얼마나 그럴 듯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 원래의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을 경외’ 함(15) 이 빠졌기에 결국은 실패한 논리이고 저주받은 이념이다.

 

communion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역시 ‘찬’, 먹는 것인데, 함께 먹을 때 진정한 나눔이 있다.  그래서 다락방 혹은 구역 모임 혹은 셀 모임 등 소규모 모임에서 함께 먹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같은 식탁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라는 의미이며 사회 계층이나 출신 배경 등을 넘어 주 안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서로 용납하며 ‘주의 몸’과 ‘주의 잔’을 통해 주님과도 하나된다는 의미이다.

 

공동체는 그래서 항상 함께 하고 함께 대화하고 함께 먹어야 한다.  주님께서 계 3:20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셨던 것 처럼 친밀한 관계는 함께 먹는 관계다.

 

그래서 오늘 말씀도 당시 먹는 문제에 대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한다.  재미있는 것은 18절에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한 마리와 살진 양 여섯 마리를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라고 말하는데, 그러한 음식들이 어떻게 준비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문맥을 보아 아마도 느헤미야 자신이 준비했다는 느낌이 있지만 12년 동안 매일 어떻게 그렇게 많은 양의 음식을 개인이 부담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아마도 ‘내가 베풀었다’라고 하지 않고 여러 영번역에서는 이러한 음식이 ‘준비되었다’ 라고 기록한 것 같다.  많은 경우 자신이 사재를 털어 공궤했겠지만 가끔 함께 자들도 나누었을 것이고, 이러한 나눔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준비된’ 것이 되었다.

 

나누기 위해서는 남는 것이 있어야 한다.  내 것도 부족한데 나누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느헤미야가 총독의 지위로 당연히 요구하고 누릴 수 있던 권리를 포기한 이유는 그가 나약해서가 아니라 현실에 쪼들려 남는 것이 없는 백성들에게 짐을 지우기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18).  하지만 나의 소유가 부족해도 나눌 때 더 풍성해 진다.  특히 영적 나눔은 나눌수록 풍성해진다.  그래서 주님께서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 ( 10:10)’ 이라고 말씀하신다 12년 동안 그렇게 많은 이들이 먹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나눔과 베풂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 제가 누린 것을 오늘도 나눕니다.  주님의 생명의 풍성함이 이 주마나마를 통해 더 많은 분들의 참여와 나눔으로 풍성해지게 하소서.  ‘우리’가 있음을 감사합니다.  또 그 안에 나눔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각개인의 소유는 부족할지라도 나눌 때 더 풍성해짐을 또한 감사합니다.  이러한 communion으로 주와 하나되고 성도들이 하나되게 하심을 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