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고 문짝을 달았던 것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오늘 말씀을 보니 궁극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역에 있어 목적을 확실히 하고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데, 가끔 수단이 목적을 대신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재건되고 보호와 경계를 위한 성벽이 재건된 후, 처음으로 했던 범국가적인 행사는 '수문' 즉 물 문 앞에 모든 백성들이 모여 여호와의 율법을 듣고 그 뜻을 배운 것이었다.
이제껏 모든 행정은 총독으로서 느헤미야가 주도했지만 이제 율법에 대해서는 제사장이며 서기관이었던 에스라에게 부탁한다. 에스라 역시 혼자 이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좌우로 함께 사람을 세워서 사역한다. 참된 팀워크를 볼 수 있다.
6절에는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자 백성들은 손을 들고 아멘으로 화답하고 곧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했다고 하는데, 참된 예배의 자세를 보여준다. 우리 말 번역에는 '예배'라는 단어와 '경배'라는 단어가 혼용되어 번역됐는데, 이 둘 모두 원어는 같다. 즉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는 '절'이다. 이런 면에서 사실 요즘은 무슬림들이 제대로 예배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대상은 분명 다르지만). 아마도 한국 기독교는 '절'이라는 단어 자체가 불교와 너무 연관되어 있었고, 거의 모든 기독교 교파가 미국과 연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절'의 실행은 멀리 했을 수 있지만, 성경대로라면 이러한 '절'이 바른 예배의 모습이다.
물론 요 4:24에서는 '영 안에서 또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지만, 영과 몸을 따로 분리하는 것이 항상 좋지는 않다. 우리의 몸을 굽혀 경배할 때 진정 영 안에서 예배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지 않을까?
아무튼 성벽을 재건한 목적은 백성들로 여호와의 율법을 듣고 깨달음으로 말씀따라 살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것 조차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10절에는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말씀하는데, 마치 여호와의 존재를 기뻐하는 것이 우리에게 힘이 된다, 즉 '우리의 힘' 혹은 '우리의 누림'이 목적이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영어에서도 그렇고 원어적으로도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기쁨'이다. 즉 이 '여호와의 기쁨'이 목적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전 10:31)'라는 구절과 일맥상통하는데, 하나님의 영광, 여호와의 기쁨이 우리의 힘 즉 궁극적 목적이라는 의미다. 소요리 문답 1 과 1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데, 이에 대한 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즉 영어로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 이다. 먼저 주께 영광돌리는 것인데, 동시에 이는 그분 자신을 영원히 누리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예정하실 때, 그 분의 기쁘신 뜻대로 하셨다 (엡 1:5). 즉 모든 것의 궁극적인 의미와 목적은 하나님 한 분이시다. 이러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은 우리의 목적이고 힘이다.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께로 옵니다. 아버지의 영광만이 인생의 의미요 비밀이며 힘이 됨을 압니다. 오직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