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말씀 범위부터 시작된 각 자손들의 하는 일과 거주지에 대한 기록이 계속된다.  성곽이 완성됐지만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면 성읍은 기능을 하지 못하기에 제비뽑아 예루살렘으로 사람들을 이주 시키고, 사람들 중 이미 다른 곳에서 살고 있지만 자원해서 예루살렘에 오는 이들을 축복했다. 

 

당시 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에 살게된 자손들을 기록하면서 그들이 맡은 일에 대해서도 설명하는데, 감독들도 있었고 하나님의 전을 맡은 자들, 용사들, 하나님의 전 바깥 일 맡은 자들, 기도할 때 감사하는 말씀을 인도하는 자, 성 문지기, 레위인들, 느디님 사람들, 노래하는 자들 등이 기록되었다.

 

그리고 나서 11장 전체에서 ‘거주했다’ 혹은 ‘살았다’고 하며 사람들이 거주하던 지역들이 열거된다.  사람들이 한 곳에 정착해서 뿌리를 내리고 각자 맡은 일을 잘 감당해야 한 국가는 굳건히 서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각 자손이 살던 마을들이 30절에는 브엘세바  유다 땅 남쪽부터 힌놈의 골짜기 즉 예루살렘까지 유다 전역임을 말하고 있는데, 앞 절에서는 ‘살다’ 혹은 ‘거주하다’라고 기록했지만 30절에는 ‘장막을 쳤다’라고 한다.

 

당시 거주 형태가 장막 치는 것이 적지 않았고 ‘장막 치는’ 것은 거주했다는 표현이겠지만, 이제 벌써 여러 세대를 거쳐 살아왔던 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집을 건축해서 살았다고 표현하지 않고 장막쳤다는 표현을 쓴다.  이러한 표현은 이 세상의 삶이 영원하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장막은 ‘칠’ 수도 있지만 ‘걷을’ 수도 있는 일시적인 주거 형태이기 때문이다.

 

11:9 에는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라고 기록하는데, 아브라함의 믿음을 얘기하면서 그가 약속의 땅에 거류했음에도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거기에 완전히 터를 잡고 살지 않고 장막에 거했다고 말씀하며 그 이유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 (10)’기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즉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우리 믿는 이들에게 보여주는 믿음의 증거는 복받고 이 땅에서 부귀를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장막에 거함으로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벧후 1:13-14에는 또한 우리의 몸도 일시적인 ‘장막’임을 말씀한다.  영원한 부활의 몸을 입기 전 이 땅에서 잠시 살기 위해 주어진 현재의 몸은 이제 얼마 있지 않아 ‘벗어날 (14)’ 어떠한 것이다.  믿음에 시험이 오는 것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마치 영원할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는 이들의 이 땅에서의 삶은 장막치는 삶이다.

 

결론적으로 믿는 이들이 사는 것은 성경에서 계속 말씀하듯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고, 우리도 그의 안에 거하고 (요일 4:13), 이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 (원어 ‘장막치다’, 1:14)’신 그리스도의 우리 가운데 장막 치심 안에 있는 것이다. 

 

주님, 주께서 우리 가운데 장막 치심을 감사합니다.  주는 우리의 거주지가 되시고, 또한 우리를 주님의 거주지로 삼기에 기뻐하셨습니다.  나의 삶이 주님 보시기에 부족하고 사람들 앞에 증거가 되지 못할 때가 많지만 주님께서 함께 거하심으로 힘을 얻습니다.  이 땅에서 위안을 얻고 만족을 얻으려는 유혹에서 구원하소서.  이 곳 저 곳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며 복음을 증거하는 주의 종들에게 성령의 충만하심을 주시고 그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소서.  저에게도 오늘 성령의 임재하심이 충만케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