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생명의 삶 제목이 ‘정결한 예배자들을 세우는 것이 먼저입니다’ 인데,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마치 그들만이 예배자들인 것 처럼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이해하고 사용하는 ‘예배’라는 단어가 매우 편협되었기에 특히 구약에 대한 내용에 같은 관점으로 적용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는 전에 많이 나누었기에 오늘은 생략하지만 ‘제사’ ‘제물’ ‘의식’ ‘경배’ ‘예배’ 등을 혼용해서 사용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아무튼 오늘 말씀은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함께 돌아온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로 시작하는데, 이들은 ‘세워짐을 받은 예배자’가 아니라 단지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사실 이번 12장 느헤미야의 때 즉 주전 450년경 보다 90년 정도 앞선 세대들이다. 그래서 ‘스룹바벨과 예수아’ 세대의 사람들은 9절까지 나오고 예수아의 아들인 요야김 세대의 제사장들과 족장들은 21절까지 나온다.
(한 가지 의문점은 ‘에스라’라는 이름이 계속 나오는데, 만일 이 이름들이 1절의 에스라와 동일인이라면 에스라는 상당한 나이의 고령자일 것이다. 적어도 130세에서 150세 정도일텐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성서학자들도 이 에스라가 같은 인물인가에 대해서 의견이 갈린다.)
그런데 1절에서부터 의문이 생긴다.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함께 돌아온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이러하니라’고 하며 ‘돌아온’ 이들에 대해 열거하는데, 이들은 왜 돌아왔을까? 또 그 반대로 그 전에는 왜 돌아오지 못했을까? 생각해 보면 포로된 정치적인 이유로 그들은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제2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그들은 돌아왔고 주전 515년에 성전은 봉헌된다. 즉 그들이 제사장들이며 레위인임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못했던 것은 정치적인 이유였고, 그들이 돌아온 것은 성전 건축을 위해서였다. 타국으로 끌려가서 제사장직이나 레위직분을 행하지 못했던 그들이었지만 그 정통성은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히브리 원어에서는 이들이 ‘돌아왔다’고 하지않고 ‘올라 왔다’고 한다. 즉 성전은 이미 파괴되고 제사 업무가 그쳤기에 그들은 모두 실업자들이 되었던 것 같아 보이지만 포로 생활 중에도 그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그들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타국에서 전혀 다른 업에 종사했을 수 있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그들의 본분을 계속 간직했기에 그들은 ‘올라 온’ 것이 된다.
이러한 면은 우리에게 도전을 준다. 풀타임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던 소위 평신도 (나는 이 말을 매우 싫어한다)로 부르심을 받던, 주의 선한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정체성을 잃을 수 없다. 어느 교단에서는 목회자의 이중직을 금했다는데, 현실적으로는 생활이 어려워서 택시 기사 등을 하면서 수입을 메우는 목회자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러한 현실적이지 않은 법을 계속 강압하려면 교단에서 생활이 어려운 목회자들에게 보조를 해줘야 할 것이다. 동시에 목회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이중직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목회자들은 이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 받은 부르심을 붙들어야 한다.
이 돌아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있는 반면, 그 다음 세대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도 있다. 포로된 이민 세대에서 본국으로 돌아온 후 다시 본국에서 일어난 차세대 그리고 그 후손들이다. 12절에는 예수아의 아들 요야김 때의 사람들을, 22절에는 예수아의 손자 엘리아십 또 그 후손들 때의 사람들에 대해 기록되었음을 말한다.
제1차 포로 귀환 때와 시간 차가 90년 정도가 나기 때문에 벌써 이렇게 많은 세대들이 생겼다. 이러한 차세대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은 사실 기적이다.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운 것이다. 주님의 섭리와 안배가 있는 것이다. 어제 밤 한종수 목사님과 저녁을 먹으며 교제를 나누었는데, 자신의 아들 딸이 생기는 것은 크고 행복한 충격이지만, 거기에서 나아가 손주들을 보는 것은 더 큰 충격이며, 더우기 손주들이 함께 모여 노는 것을 보는 것은 전혀 새로운 디멘션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감격은 자식이 없는 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차세대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그래서 영적인 자녀들을 얻는 것 역시 영광스럽고 충격적이기 까지한 일이다. 이러한 생명을 이어가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문제다. 그래서 조바심 낼 필요는 없다. 주께서 인도하신다.
주님, 나의 입술로 아멘하기 원합니다. 환경이나 상황이 차세대가 끊어지는 것 같아 매우 염려되지만, 주님께서 다음 세대를 일으키실 것을 믿습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할 것은 할 수 있는 마음을 주소서. 소망을 갖지 못하고 헤매는 젊은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만나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