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 밖에 되지 않는 매우 짧은 책인 오바댜는 ‘바빌로니아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던 주전 587년과 538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전해졌다 (위키)’고 한다. 즉 1절부터 나오는 에돔 혹은 에서에 대한 책망의 원인은 유다가 멸망할 당시 원래는 이스라엘 민족의 형제였던 에돔(에서)이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음은 물론 이방인들처럼 유다의 멸망에 한 몫을 했기 때문이었다.
12절부터 14절까지 ‘~않을 것이며’의 시제가 몇몇 영번역에서는 개역처럼 현재로 나오지만 다른 몇 영번역에서는 과거형 조동사 should have not으로 번역했다. 즉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의미인데, 이러한 번역이 더 맞는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10-11절에 이미 에돔이 ‘네 형제 야곱’에게 악하게 행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돔은 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을, 특히 그의 형제에게 했기 때문에 심판받고 망하게 되었다 (5절).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에돔에게 ‘네 형제 야곱’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러한 말씀이 과연 정당한지 의문이다. 원래 이삭으로부터 난 쌍둥이 야곱과 에서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통해 야곱에게는 축복을, 에서에게는 저주를 내리셨다. 그리고 말 1:2-3에서도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고 말씀하며, 롬 9:13에서도 이를 인용하며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한다. 에서의 입장에서 보면 야곱 혹은 유다는 더 이상 형제가 아니고 오히려 자신의 복을 사기쳐서 빼앗은 원수가된다. 하나님께도 버림 받은 소망없는 에돔은 소위 ‘막가파’가 되어도 어쩔 수 없는 족속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실 이러한 에서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다. 하나님 마음에는 에서를 보실 때 계속해서 야곱의 형제로 보셨기 때문이다. 심판을 하시면서도 ‘네 형제 야곱’ 즉 그 형제됨을 부정하지 않으셨다. 아쉬운 것은 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고 그의 형제에게 악을 행했으며 결국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10절)’는 심판을 받는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서는 아직도 건재한 것 같다. 이삭의 저주를 받은 후 에서는 금방 망할 것 같았지만 오히려 큰 부를 이루어 창대해진 것을 창세기를 통해 볼 수 있다. 더우기 히 11:20에서는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라고 기록하는데, 에서에 대해 저주라고 하지 않고 이삭은 믿음으로 둘 모두에게 축복했음을 밝힌다. 창 27:39-40의 내용을 보면 결코 축복의 내용이 아닌 것 같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축복이라고 한 이유가 뭘까? 바로 ‘믿음’에 있다.
저주받은 족속 혹은 민족이라도 주님 앞에 겸손히 다시 돌아오는 믿음이 있다면, 주님께서는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 6:37)”고 말씀하신다. 모압과 암몬은 성회에 들어오지 못했지만 모세를 거슬러 죽임을 당한 고라 자손은 후에 회개함으로 다시 하나님을 찬송하는 위치에 서게 되고 (대하 20:19), 시편 곳곳에 찬송시를 남긴다. 결국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정죄받았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로 다시 주님 앞에 설 수 있게 되고 의롭게 되었고 거룩하게 되었으며 영화롭게 되었다 (롬 8).
주님, 저는 실존적으로 소망 없는 죄인임을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그러기에 죄를 짓는 것은 당연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기질이 내 안에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저를 의롭다 하셨고 거룩하게 하시며 영화롭게 하심을 믿고 소망하며 오늘도 주 앞에 섭니다. 저주의 말씀은 나의 죄됨을 심판하시지만, 언약의 말씀은 저를 새롭게 합니다. 저를 살리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