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요1을 읽으며 전에 없던 질문이 생긴다.  과연 요한은 이 책을 믿는 자들에게 쓴 것일까 아니면 그냥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씀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일까?  수신자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기 때문에 명확하지는 않지만 2, 3절의 ‘너희’는 믿는 이들이라기 보다는 믿지 않는, 이 ‘생명의 말씀’에 대해 잘 모르고 사도 요한과는 아직 사귐이 없는 이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요한1서 전체를 보면 그 내용이 비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은 또 아닌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내용이 성경 마지막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이한데, 믿는 이들 중에 아직도 확신이 서질 못하는 많은 이들에 대해 요한은 그 특유의 그물 깁는 사역을 ( 1:19)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5:13에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한다.  그렇다.  5장을 보니 수신자는 믿음이 있지만 아직 영생에 대해 깊은 통찰이 없는 이들에게 쓴 서신임이 드러난다.

 

아무튼 1절부터 매우 흥미를 유발한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처음으로 쓴 단어를 다시 쓰는데, 바로 태초’라는 단어이며 원어도 동일하다.  즉 ‘아르케’ 인데, 이것은 시간을 초월한 시작을 의미하며 영어의 ‘고고학 archaeology’의 어원이다.  요한복음 1:18에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하며 이 말씀의 비밀스러움을 증거하지만, 이제 이 말씀은 더 이상 아버지 품 속에만 계시지 않고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가 되었다 (1).

 

그런데 이 1절의 시제가 좀 특이하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의 동사 둘은 완료형이지만 ‘자세히 보고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의 동사 둘은 아오리스트다.  요한은 과거 주님을 모시던 때에만 자신과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자세히 보고 손으로도 만졌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전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육신의 눈으로 봤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계속적으로 더 깊이 주님을 알아가는 즉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지’는 것을 경험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데, 2절의 ‘너희’가 1절의 ‘우리’로 바뀔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3절의 ‘우리’와 ‘너희’간에 사귐이 있고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 있게 한다. (원어에는 ‘누림’은 없고 ‘사귐’이다.  즉 사귐이 누림 자체를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이 ‘사귐’은 ‘코이노니안 (원형 코이노니아)’인데, 그냥 보통 친구를 사귀는 식의 사귐이 아니라 그 의미는 매우 친밀하다는 뜻으로 오히려 부부간의 사귐의 깊이까지도 의미한다.  이러한 사귐은 사실 현대를 사는 이들에게는 익숙하지 않다.  우리는 사람들 간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기 원한다.  하지만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을 통해 믿는 이들 사이에도 이러한 깊고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짐을 증거한다.  (아… 그런데 개인적으로도 사실 부담이 있다.  나 역시 나만의 울타리를 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울타리는 건강한 '바운더리'라기 보다는 다른 이들에게 숨기고 싶은 어떤 것, 거리를 둠으로 좀 편하려는 나의 한계이다.  이런 코이노니아는 그냥 패스하고 싶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진정으로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 있다면 그 동일한 누림을 누리는 형제들과는 역시 동일한 사귐이 있을 것임음을 부인할 수 없다.)

 

4절은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는데 원어에는 ‘너희의 기쁨’ 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을 쓰는 요한은 이미 기쁨이 충만했기 때문에 ‘너희들’도 그 동일한 기쁨으로 충만케 하기 위해 이것을 쓰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충만하다’의 원어 ‘페플레로메네’의 원형은 ‘플레로오’인데, 5:18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와 동일한 단어이다.  하지만 시제가 다른데 성령의 충만은 현재 진행형 즉 ‘성령의 충만을 받고 있어라’ 인데 비해, 4절의 충만은 완료형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쁨은 이미 더 이상 채울 수 없는 완료된 기쁨이다.  이것을 더하기 위해 무언가를 추가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충만하게 하려 함’이 필요하다.  성령 충만은 매일 필요한  양의 충만을 구해야 하는 것이지만 우리 안의 기쁨은 이미 은혜로 충만하다. (원어로 기쁨은 '카라', 은혜는 '카리스'.  문자적으로는 상관없지만 비슷하게 들린다.)

 

(나눔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여기서 멈춥니다.  오늘 나의 쓸 것은 여기까지. ^^)

 

주님,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 4:7)  제자들은 주님의 육성을 듣고 눈으로 주님을 봤지만, 그것은 이미 2천 년이 지난 일임을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령 안에서 주님을 더욱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 처럼 경험할 수 있도록 우리 가운데 코이노니아를 마련하셨음에 감동합니다.  성도들 간에 벽이 없는 코이노니아로 인도하소서.  부부 간에 허물 없는 친밀함으로 인도하소서.  가족 간에 거리낌 없는 코이노니아로 인도하소서.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께로 옴으로 그 깊은 사귐 안으로 더욱 인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