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 1장 여러 구절은 계속해서 '우리가'로 시작하는데, 죄의 대한 문제 역시 '만일 내가' 혹은 '만일 누가' 라고 하지 않고 '우리가'로 시작한다. 또 죄를 말하면서 '사귐, 코이노니아'와 함께 연관지어 설명한다. 이 '죄'는 '하마르티아' 즉 '목적을 벗어난 것'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한 사람 개인의 잘못이나 범법도 포함하지만, 인류의 포괄적인 죄, 즉 하나님을 떠나 죄의 노예가 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게 타락한 상태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죄사함의 목적은 죄의식에 대한 해방감이나 후련함이 우선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이 그 참된 목적이다.
1장에서는 '우리가'에 대한 단체적인 혹은 인간의 보편적 죄를 만졌다. 그래서 '자백'역시 단체적인 '우리' (8, 9, 10절)의 자백이다. 물론 자백이 개인적인 자백도 있고 이에 대한 개인적인 죄사함도 있지만, 단체적인 자백에 대한, 즉 모든 인류의 총체적 타락에 대한 자백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이에 따라 주님의 죄 사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됨을 말씀한다.
그런데 2장에서는 '누가 (1절), ~자는(4절), ~자는(6절)' 등 개인적인 죄에 대해 언급한다. 재미있는 것은 1절에 '만일 누가 범죄하여도... 대언자가 있으니' 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의 '대언자'는 '파라클레토스' 즉 요 14:16절의 '보혜사' 성령과 같은 단어이다. 만일 다른 제자가 썼다면 관점이 다를 수 있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요한복음을 쓴 요한은 다시 요한 1서를 쓰면서 이 '보혜사'라는 단어를 '성령'에 국한시키지 않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힌다. 성령과 아들 하나님 이 두 분은 구분할 수는 있지만 모두 같은 참 하나님이심이 분명하다. 특히 누군가 신앙 생활을 하다가 '하마르티아' 즉 어떤 이유에서든지 목적에서 벗어나 다시 방황하게 될 때 '파라클레토스'로서 위로하시고 변호하시는 분은 그리스도 예수시며 그의 영이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개인적인 신앙의 삶에 대해 위로를 주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나 자신의 죄에 대한 화목 제물만이 아니라, 사실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시는 (2절) 제물이 되신다는 점이다. 믿는 이들이야 그리스도의 공로를 붙잡음으로 죄에 대해 해방되었지만, 세상 죄에 대해서는 어떻게 화목이 되는가? 이 점이 바로 놀라운 그리스도의 은혜다! 요 1:29에서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고 기록한 요한이 다시 한번 예수의 보혈은 우리 믿는 자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해결했음을 분명히 한다.
죄는 하나님이 사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믿는 자들의 죄 뿐만이 아니라 온 우주의 '하마르티아'를 단번에 해결하셨다. 그렇기에 주님은 '화목 제물'이 되시고, 주님으로 인해 이미 죄 문제는 끝났기에 하나님은 세상에 대해 화목을 청하시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주님의 공로를 세상이 인정하는가에 달렸다. 그래서 죄의 문제는 더 이상 '계명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9)' 즉 이러한 죄사함을 믿느냐 하는 문제가 된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죄 때문에 심판 받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기 때문에 심판 받는다. 믿지 않음으로 죄 사함은 그들에게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의 원리가 있음에도 5절 부터는 다시 '말씀을 지키는' 그리고 '행하는 (6절)', '새 계명 (7, 8절)' 등 다시 무언가 지키고 사는 문제를 말씀한다. 이것은 믿음과 행함이 서로 다른 문제가 아님을 밝히는 동시에 다시 한번 '관계'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죄에서 해방된 후 우리는 '육체의 기회를 삼'는 것 (갈 5:13)이 아니라 새 계명 즉 '형제를 사랑'하는 것, 즉 능동적인 관계의 회복이 목적이 된다. 그리스도의 죄 사하심은 너무도 강력해서 그의 소위 '칭의 (나는 '수의'라고 표현하고 싶다. 영어로는 수동태 justified이기 때문에)'는 육체의 기회를 삼을 수도 있게 할 정도이다.
하지만 진정한 죄 사함의 결과는 '형제 사랑'이다. 문자적으로 '형제 사랑'이라는 '삘라델삐아' 라는 단어도 있지만, 여기서는 '사랑'을 '아가페'로 계속 사용하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형제 사랑은 곧 죄사함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사랑으로 사랑해야 하는데, 결국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먼저임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과 힘 아니면 불가능하다. 죄사함 받았다 하면서 형제를 돌아보지 않으면 그 죄사함은 헛 것이 된다.
주님, 아가페의 그 사랑을 다시 한번 제 안에 충만케 하소서. 어제 말씀에서 기쁨이 충만한 것 처럼, 그 사랑도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것을 믿습니다. 감정으로서의 사랑이 아닌, 주님의 인격으로서의 그 죄 사하심과 생명주시는 사랑으로 오늘 주의 사랑이 필요한 이들에게 보내소서. 내 마음 응어리진 부분, 아직도 사랑하지 못하는 이웃과 형제 친지등에 대해 주님의 사랑으로 먼저 녹아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