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 2장은 좀 어렵다. 요한의 문체가 일반적으로 쉽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요한복음도 그리 쉽지는 않고 특히 요1 2장은 고민을 좀 많이 해야할 것 같은데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아오리스트 시제가 작렬(?)하기 때문이다. 보통 아오리스트 즉 부정시제는 과거형이나 과거 완료로 많이 번역되고 이해됐지만, 문제는 항상 그렇지 않다는 것에 있다. 예를 들어 1절부터 '죄를 범하지' 도 아오리스트이고, 28절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과 '부끄럽지 않게' 라는 부분은 문맥으로 보아 분명 미래의 이야기지만 시제는 아오리스트로 쓰였다. 즉 아오리스트 시제는 시간을 초월하는 개념의 시제이다. 시간을 초월하는 시제인 아오리스트 동사가 2장에는 20번이나 나온다.
12-14절은 영적 연륜에 대해 말씀하는데 얼핏 보면 같은 말씀을 되풀이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원어에서는 시제가 다르다. 12, 13절, 개역 14절 전반 '아이들'까지는 모두 현재 시제 즉 '쓰고 있는 것은' 이라고 기록하지만 14절 아비와 청년들에 대해서는 아오리스트 부정시제를 쓴다. 희한하게도 이들에 대한 동사는 앞 구절들과 동일하게 현재와 완료형이 온다. 복잡하다..
2장 1절은 '나의 자녀들아'라고 시작하는데, 이 '자녀, 테크니아'라는 단어는 영어로 하자면 'kids' 즉 사랑이 가득한 단어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들을 '나의 자녀들'이라고 말한 것은 요한의 생명으로 그들이 태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을 향한, 이제 나이 많은 요한의 넘치는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요한은 유독 이러한 자녀들과 (12절) 아이들에 (14절) 대해서 '글을 쓰는'것은 둘 다 현재 시제를 사용하는데, 12절은 죄를 사함 받았기 때문이라고 쓰고 있고, 14절은 아버지를 알았기 때문에 '글을 쓰고 있다'고 한다.
자녀들 혹은 아이들은 아직 어리기는 하지만 영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을 소유함으로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이들이다. 이들은 우선 죄사함을 받았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눈뜬 자들이다. 거듭난 이들이다. 그래서 한번 거듭나면 다시 옛 사람이나 상태로 돌아갈 수 없고 그 자녀된 위치를 잃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에 대해서는 현재 시제를 쓴다.
재미있는 것은 자녀들 혹은 아이들 후에는 청년이고 그 다음에 아비들의 순서가 맞을 것 같은데 요한은 아비들을 먼저 언급하고 그 다음에 청년들을 언급한다. 이것은 이 부분이 영적인 성장이나 연륜에 대해서 분명 말씀하고 있지만 동시에 영적 상태 혹은 그 성숙함을 지키는 문제를 만지고 있다. 즉 아비들에 대해서는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에 대해 말씀하는데, 아이들이 '아버지를 알았음'과 비교해 볼 때 아이들은 아버지와의 관계 즉 생명의 문제에 대해 눈을 뜬 것이라면, 아비들 즉 성숙한 이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 즉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좀 희한하다. 예수님께서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고 말씀하시며 주님을 통해 아버지께로 옴을 말씀하는데, 여기 2장에서는 이상하게 아이들은 아버지를 알고, 영적으로 성숙한 이들은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사실 전율을 일으키게 하는데, 아이들이 '아버지를 아는 것'은 절대자로서의 '신'적 존재를 인지하는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 절대자이며 거룩하셔서 결코 알 (기노스코)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를 직접 경험하고 더욱이 그와 연합하게 하시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그리스도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것은 매우 민감하고 친밀함에 관한 문제이므로 한번 과거의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두번째 14절에서는 아오리스트 시제를 쓰면서 아비들에게 한번 더 그 위치를 확인한다.
마찬가지로 청년들에 대해서도 13절에서는 '악한 자를 이기었음'을 말씀하는데, 14절에는 '강하고 하나님 말씀이 거하시고 흉악한 자를 이겼음이라'고 한다. 여기의 모든 시제는 현재 혹은 완료이다. 즉 이러한 청년의 모습을 현재 혹은 완료됨을 지키라는 의미에서 14절에는 '내가 너희에게 쓰다'에 아오리스트 시제를 사용한다.
그러면서 권면하는 말씀이 15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한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는데, 즉 13-14절의 아비 혹은 청년의 영적 위치나 성숙함이 흔들리게 된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아비로서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것'이 흔들린다. 청년으로서 세상과 맞서 싸워야 하는 건강함도 잃게 된다. 악한 자를 대항할 힘도 잃게 된다.
이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문제다. 세상은 사랑할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안에 더욱 충만히 거해야 한다. 이것은 24절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는 것으로 가능한데, 이 '처음부터'라는 단어는 '태초부터'와 같다. 즉 한 개인이 복음을 들었던 그 시간을 의미하기 보다는 그 복음 자체의 '태초'가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그 안에 거함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문제다.
... 그와 같이 변화됨 (요1 3:1-12)
사도 요한은 2장에서 계속 사용했던 '자녀들, 테크나'라는 단어를 3장에서도 계속 사용하는데, 아비들 혹은 청년들에 대해서도 언급했지만, 중요한 것은 생명의 문제인 '자녀들'에 대해 계속 언급한다는 점이다. 1절에서는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라고 감격한다. 그런데 2절에 오자 이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을 훨씬 넘어서는 계시가 있다. 하나님의 자녀되는 것도 감격스러운데 2절에서는 그 훨씬 이상, 아니 상상하지 못하는 진리를 밝힌다.
2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라고 하는데,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된, 어떻게 보면 어리숙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있지만 장래 어떤 모습이 있을텐데, '그가 나타나시면' 즉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에 (2:28)' '우리가 그와 같을' 것이라고 한다. 이 '같다, 호모이오스'라는 말은 '동일하다'와는 다른 말이다. 요 5:18절에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의 '동등'은 '이손'이라는 단어로 양과 질이 모두 같다 즉 동일하다는 뜻이지만, '호모이오스'는 '비슷하다, 닮다'의 뜻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동등'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같아질 수'는 있는데, 바로 2절 말씀 처럼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성장할 때, 그리스도를 닮음으로 그와 같아지게 되는 것이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에게 이끌어 가셨는데, 아담은 하와를 처음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한다. 즉 자기 자신과 같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동일한 인물은 아니다. 그 둘은 '같았'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해 그 안에서 성숙하면 그와 같이 변화된다.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인데, 이 '보다'라는 단어는 육적인 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의 육안으로 거룩하신 그 분을 맞대고 보게 된다.
죄 (하마르티아)를 짓는, 혹은 짓지 않는 문제 (3절 이하)
이러한 것은 우리에게 '소망 (3절)'이 되는데, 이 놀라운 소망을 위해 자신을 깨끗하게, 즉 죄를 짓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불법을 행하지 않는 것 (4절)'과 '그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9절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고 말씀하며, '범죄하지 못'한다고 한다. 1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우리가 범죄했다고 하고, 자백할 때 죄를 사하신다고 했는데, 9절에서는 반대로 죄를 '지을 수도 없다'고 말한다. 논리적으로 상충하는 것 같은데, 사실 우리의 삶 속에서 온전히 거룩하게 살지 못하고 때때로 실수하며 죄를 짓는다. 그래서 자백이 필요하고, 자백함으로 다시 주님의 보혈을 적용하고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한다. 9절 말씀은 이러한 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실수나 범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삶 자체가 새롭게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목적을 잃는 죄 즉 하마르티아는 우리에게 존재할 수가 없고, 무엇을 하던 목적은 하나님이 된다.
그러면서 12절에는 가인과 아벨에 대해 말씀하는데, 형제를 죽인 가인의 죄를 언급하지만, 상대적으로 아벨의 의로움을 말한다. 아벨의 의로움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첫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제물을 드린 것이다. 즉 피를 흘림으로 생명을 드리는 제물이다. 가인도 좋은 물건으로 드렸지만 거기에는 피흘림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만 받으신다. 둘째는 그 삶 자체이다. 가인은 자신을 위해 살았지만, 아벨은 양치는 자로서 당시에는 양고기를 먹지도 않던 때였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목적으로 그의 삶을 살았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 어떤 모양이든 무엇을 하든 100% 하나님을 위하는 삶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통한, 그리스도만을 위한 삶이 바로 의로운 삶이다.
주님, 미국 독립절이라 시간이 많아서 묵상을 좀 더 할 수 있었음을 감사합니다. 저는 주님 앞에 온전하지 못한 죄덩어리임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생명으로 거듭남으로 인해 주께서 나와 나의 삶을 받으심을 감사합니다. 나의 생각이 더 변화되게 하시고 기질이 바뀜으로 그 날 주님을 볼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독립절인 오늘, 참된 독립은 온전히 주께 의지함임을 기억하고 주를 위해 100% 살 수 있는 하루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