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사도라는 별명답게 요한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  사실 요한 서신서들을 비롯해서 요한복음과 계시록까지 모두 핵심은 사랑에 있다.  이것을 간과할 때가 많은데, 요한1 3장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11번 나온다.  명사형 ‘사랑’과 동사형 ‘사랑하다’ 그리고 호격 ‘사랑받는 자들아’ 등으로 나오는데, 1절부터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을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 동일한 사랑으로 요한은 형제들을 부르고 있으며, 그 동일한 사랑을 실천함으로 형제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이 사랑은 목숨까지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처럼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인데, 17절에는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사랑의 실행을 말씀한다.  바로 ‘형제의 궁핍함’을 돕는 것인데, 바로 ‘이 세상의 재물’을 통한 도움이다. 

 

그런데 ‘궁핍함’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크레이아’로 단지 ‘필요함’을 뜻한다.  물론 이것이 ‘궁핍함’을 의미할 수 있지만 문자적으로는 단순히 ‘필요’이다.  ‘재물’의 원어는 ‘비오스’로서 원래 의미는 ‘생물학적 생명’이다.  영어의 ‘biology’에서 앞부분 bio인데, 이것이 때에 따라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건 혹은 재원 등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의 ‘가지고 (에코)’는 ‘갖다, 소유하다, 쥐다’ 등의 의미인데, ‘쌓아둔’ 재물이 아닐지라도 손에 어떠한 것을 쥐고 있다면 그것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즉 재물이 풍족해서가 아니라, 단지 이러한 재물을 조금이라도 소유하고 있으면 그것이 필요한 형제들과 나누는 것이 실천적이며 현실적인 사랑이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나눔의 생활화를 의미한다.  단지 어떤 재난이나 특별한 일을 당해 힘들어 하는 상황에 대한 도움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필요가 있는 곳이면 내가 나눌 수 있는, 내 손에 지금 쥐고 있는, 내 은행 어카운트에 지금 남아 있는 것으로 도우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그러고보면 성경에서는 경제적 개념과 상반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부자들에게 가끔 주님은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신다.  부자들의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면 거시경제적으로는 손해고 가난한 자들은 그 받은 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 것이 뻔하다.  또 아무리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도 그냥 값없이 도움을 주면 계속해서 도움만 바라고 자립하지 못하게 될 경우를 현실적으로 너무나 많이 봐왔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사랑’을 정의하면서 하나님께서 먼저 베푸셨기 때문에 형제들에게 세상 것들로 서로 섬길 것을 말씀한다.  즉 이러한 나눔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먼저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받은 만큼 할 수 있다.  나의 소유가, 내가 누리는 것이 나의 힘이나 능력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은혜라고 믿는다면 나누는 것에 인색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가 필요하다.

 

물론 나누는 것이 제대로 사용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고심해 봐야 한다.  내가 베푸는 재물이 악한 것에 쓰이거나 잘못 쓰인다면 그 책임은 나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내 손에 정말 쥐고 있는 것이 없다면 오히려 내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도움을 받는 것도 공동체 안의 사랑이 흐르게 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 (21).

 

주님, 주의 온전한 계명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기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이름, 아버지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주신 이름을 묵상합니다.  무엇이든 주께 구해서 얻음으로 감사가 넘치게 하소서.  나누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게 하시고, 정말 필요한 곳에 사랑이 흐르게 하소서.  주의 사랑이 나를 향해 흐르시는 것 처럼, 이 사랑이 나에게서도 흘러 주위를 적시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