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사랑장’이라고 하는 고전 13장에도 사랑이라는 단어가 9번 정도만 나오지만, 요한1 4장은 명사형 동사형 호격 등을 포함해 번역에 따라 32번이나 나온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정의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근원과 과정도 밝힌다.

 

사랑을 말하기에 앞서 영들 분별함을 말하는데, 매우 기본적인 것을 다루고 있다.  즉 거짓 선지자나 적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 혹은 ‘예수를 시인’하는 문제로 판가름 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당시 소위 영지주의는 물론이고 유대교도 부인하는 것이었다.  물론 구약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첫번째 오심을 부인하는 유대교를 상대적으로 대적하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4절에 ‘이기었나니’ 즉 ‘이기다’는 단어를 썼는데, 앞 장에서도 썼고 다음 장에도 나오지만 계시록에서 연거푸 쓰인 단어이며, 16:33에 주님께서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신 그 ‘이김’이다.  이 단어는 ‘니카오’라는 단어인데 소극적으로는 ‘견뎌내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실은 매우 적극적인 단어로 ‘승리하다, 정복하다’의 의미이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믿고 증거하는 우리의 믿음이 세상과 거짓 선지자와 적그리스도를 이기고 정복한다.

 

7절은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시작하는데, 요한은 계속 수신자들을 이렇게 부른다.  이 단어 ‘아가페토스’가 문법적으로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말 ‘사랑하는 자들아’ 보다는 ‘사랑 받는 자들아’가 더 가까운 것 같다.  요한도 물론 수신자들인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했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원래  요한의 사랑에 앞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이들이고, 요한 역시 이 동일한 사랑을 받고 그 동일한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다.

 

7절에만 ‘아가페’와 거기에서 파생한 단어가 네 번이나 나오는데, 요한은 같은 단어를 이렇게 많이 쓰는 것이 좀 지겹지 않았을까?  한 문장에서 같은 단어를 연거푸 쓰는 것은 글쓰는 이들이라면 가능한 피하고 싶어하는 문제지만 요한은 계속해서 4장에서만 32번이나 아가페 혹은 아가페의 변형을 쓰고 있다. 

 

그래서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헬라어로는아가페’인데 이 단어는 성경 외에 다른 헬라어 문학에서는 찾기 힘든 단어라고 한다.  보통 헬라어의사랑’은필레오’가 많다.  그래서 몇몇 성경 학자들은 이아가페’라는 단어가 당대 그리스도인들이 만들어낸 헬라어가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코이네 헬라어는 여러 문화를 아우르기 때문에 외래어가 헬라어로 된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재미있게 히브리어 중에아갑 עָגַב’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아갑’이라는 단어는 구약에 7번만 나오는 단어로 원래 의미는 ‘과도하게 사랑하다’ 혹은 ‘지나치게 음욕을 품다’ 등의 뜻이다.  에스겔 23장에만 6번이 나오는데, 5절 “오홀라가 내게 속하였을 때에 행음하여 그가 연애하는 자 곧 그의 이웃 앗수르 사람을 사모하였나니” 에서 ‘사모하다’에 해당하는 단어다.  7절에 ‘그가 앗수르 사람들 가운데에 잘 생긴 그 모든 자들과 행음하고 누구를 연애하든지 그들의 모든 우상으로 자신을 더럽혔으며’에서 ‘연애하다’의 뜻으로 쓰였다. 

 

히브리어 ‘아갑’이 ‘아가페’의 어원일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의미상 잘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사람이 우상을 향해 ‘과도한 사랑’을 하면 행음이 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과도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다.  그래서 ‘무조건적인 사랑’이 된다.  이러한 무조건적인 사랑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라고 정의한다 (8).  7절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은 하나님을 알고 서로 아가페 사랑하는데, 사랑이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이고, 8절에서는  아예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독생하신 아들을 보내시고 화목제물로 삼으셨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말씀한다.

 

이 ‘아가페’가 히브리어를 근거한 헬라어 외래어라고 한다면 당시 일반인들은 금방 이해할 수 없는 단어다.  예를 들어 우리 나라에 처음 ‘커피’가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한자로 ‘가베’라고 표기해 불렀다.  하지만 커피를 한번도 보지 못했던 일반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아가페’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설명을 해도 그 단어는 비밀이었다.  그러고 보면 비밀스럽고 거룩하신 하나님, 소위 ‘호 떼오스’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아가페’라는 단어로 정의를 하는데, 이 단어 역시 비밀스럽고 온갖 것을 포괄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아가페’인데, 이 ‘아가페’는 비밀이다.  마치 구약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비밀스러운 것, 어쩌면 ‘나는~이다’라는 뜻이 그 ‘~’에 모든 것을 포함할 수 있는 것이 되는 것 처럼, 이 아가페 역시 그렇고 하나님의 비밀이 그러하다.  이러한 감추어진 분이 ‘독생하신 아들’로 우리에게 오셨고, 그 비밀스러운 ‘아가페’는 우리가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은혜 ‘카리스’가 되었다.

 

주님, 비밀스럽고 근접할 수 없는 아버지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제 열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삶이 단조롭고 무의미하게 느낄 때가 있지만, 이러한 진리 앞에 풍성해 집니다.  나의 관심이 나의 어떠함이나 나의 변화됨에 머물지 않게 하소서.  모든 것의 근원은 아버지시고 그 사랑을 통해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음을 배웁니다.  천연적인 내 자신 속에는 도무지 사랑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그 비밀스러운 사랑이 오늘 다시 나에게 은혜로 다가오소서.  주께서 만지실 때 나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