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시작하는데 여기의 ‘마땅하다’는 원어로 ‘오뻬일로’라는 단어이다.  우리 말 ‘마땅하다’를 관계적 측면으로 해석한다면 ‘당연하다’ 혹은 ‘자연스럽다’로 이해할 수도 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니 우리도 자연스럽게 그 생명으로 사랑할 수 있다 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오뻬일로’는 강제적 성격을 띤 단어다.  그 원래 의미는 ‘빚을 지다’로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단어다.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라는 구절에서 쓰였고, 명사형 ‘빚진 자’라는 단어는 롬 1: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리고 롬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등에도 쓰였다.

 

재미있는 것은 이 단어가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짓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 6:12)’ 에도 쓰였는데, 문자적으로 번역하자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탕감하여 주고 있는 것 같이 우리의 빚들도 탕감하소서’ 라는 뜻이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생명을 말하는데, 이 생명이 믿음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면 그 생명의 씨앗이 자라고 우리가 주님께 붙어 있을 때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말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러한 생명의 자연스러움이 아니라 강제력을 띠는데,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성장이나 서로 사랑함이 더디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 만이 아니라 우리의 천연적인 기질과 육신의 도전이 항상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은 강제력이 있게 된다.  이것은 종교적 고행이 아니라 실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다음 12절에는 놀라운 말씀이 있는데, 이러한 강제적인 사랑이라도 그러한 사랑을 한다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고 밝힌다.  재미있는 것은 15절에는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고 하는데, ‘우리가 서로 사랑 하’는 것과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길래 그 둘은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게 하실까?  이것은 인과관계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없이는 사랑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인 예수님을 통해서만 즉 그 생명과 그 분의 영으로만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아무리 강제성을 띠어도 우리 자신에게는 그러한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나 마음이 없다.  그래서 다시 한번 16절에 하나님께서 아가페이심을 재정의한다.

 

특이한 것은 17절에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이라고 하는데, ‘우리의 사랑’이 온전히 이룬 것이 아니라, ‘헤 아가페’ 즉 ‘그 사랑’이 우리와 더불어 (메뜨 헤몬) 완성되었음을 말씀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우리의 인간적인 사랑은 결코 온전할 수 없고 영원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 사랑’이 '우리와 더불어' 온전히 이루었다.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바울은 고백하는데, 평생 주님을 위해 삶을 바친 바울 조차도 죽기 전까지도 ‘온전히 이루’지 (같은 단어, 테텔레이오타이) 못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이미 ‘우리와 더불어’ 완성되었다 (과거 완료).  하나님의 그 사랑은 우리 없이는 온전히 이룰 수 없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더불어 얽히게 한 어떠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같은 이유로 우리의 사랑 역시 형제들과 얽힌 것이 된다.  사랑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평생 빚진 자의 모습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것이 자유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것은 진리이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다른 이들의 빚도 탕감해 줄 수 있는, 또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주님, 오늘 아침에도 사랑하지 못했네요.  ‘내 안’이 아니라 ‘우리 안’에 혹은 ‘우리와 더불어’ 온전하게 되신 그 사랑을 다시 한번 주목합니다.  평생 주께 빚진 자되고 형제들에게 빚진 자된 저를 발견합니다.  나의 것이 아닌 '헤 아가페', 이 놀라운 사랑이 나의 구좌로 들어 왔으니, 이 빚을 잘 베풀게 하소서.  마치 바닥나지 않는 은행 계좌처럼 이 받은 빚은 한계가 없음을 믿습니다.  이 생명이 우리 가운데 성장하게 하소서.  이미 그 사랑이 우리와 더불어 온전하게 됐음을 인해 찬양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