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2서에는 장로 요한이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쿠리아'에게 편지를 쓴 것에 비해 요한 3서는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편지한다. '참으로'는 원어로 '진리 안에서'라는 의미와 같다. 이 '가이오'는 당시 현존 인물이었겠지만, '쿠리아'처럼 그 의미가 있는데, 라틴어 어원을 보면 '주'라는 의미다.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전서 등에 같은 이름이 등장하지만 이들이 같은 인물인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그 이름의 의미가 '주'라는 것이다. 요한 1서는 믿는 이들을 대상으로, 2서는 교회와 그 안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썼다면 요한 3서는 이 한 인물 '가이오'에게 쓴다.
이 가이오에 대해 장로 요한은 칭찬하며 축복하는데, '진리 안에서 행'하기 때문이고,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한 '너의 사랑' 등이 그 이유다 (3절-8절). 즉 가이오가 축복을 받은 이유는 이러한 행하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고, 이는 그의 '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된다. '강건'이라는 단어는 몸이 건강하다는 뜻도 있지만 '건전하다, 정상적이다'는 의미도 있다. 두 번 쓰인 '잘되다'라는 단어는 소위 '번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단어 '유오도오'를 분석하면 좋다라는 의미의 '유'와 '호도스'의 복합어인데, '호도스'는 '합당한 길, 올바른' 등의 뜻이 있다. 즉 이 축복은 잘먹고 잘살라는 말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합당한 일을 행하고 그렇게 할 수 있기를 축원한다는 의미이다.
이 가이오와는 반대로 9절에는 '디오드레베'라는 인물이 언급되는데, 그 이름의 뜻은 '제우스 (혹은 주피터)에게 부양받는' 이라는 뜻이다. 교회 안에 들어왔음에도 아직도 주님과 그의 성령으로부터 양분과 생명을 공급받지 않고 이방신 제우스에게 부양받는 이들이 있다. 더우기 그는 교회 안에서 '으뜸되기를' 원했다. 그리스도의 주되심보다는 자기가 높아지려고 했다. 교회 안에 있음에도 아직 디오드레베는 그의 주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제우스이고 자기 자신이다. 그의 Lordship은 잘못되었다. 합당하고 올바른 Lordship이 없을 때 신앙 생활은 흔들리고 악한 것에 쓰임 받는다.
재미있게도 그 다음 12절에 언급되는 '데메드리오'는 칭찬을 받는다.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는데, 단지 교회 안에서 믿는 이들에게만 증거를 받은 것이 아니라 '뭇 사람에게도' 증거를 받았고, 또 진리 안에서도 증거를 받았다. 사도행전에는 같은 이름이 나오는데 구리장색으로서 악한 인물로 묘사되기 때문에 같은 인물은 아닐 것이다. 에베소에서 등장한 사람인것 처럼 이 이름의 뜻은 "Ceres에 속한"인데, '디오드레베'와 별로 다르게 들리지 않는다. '제우스'이건 '세레스'이건 로마 이방종교의 신들이기 때문이다. 이 '세레스'는 로마식이고, 같은 여신의 이름은 헬라어로 '데메테르'이다. 추수와 농업과 생식을 관장하는 여신이었는데 마치 구약의 '바알'을 연상케 한다. 태어날 때 이러한 이름을 받았지만, 이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남으로 더 이상 '세레스에 속하'지 않고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은 진리와 그리스도에 속한 이가 되었다. 그의 주는 더 이상 '세레스' 혹은 '데메테르'가 아니라 '크리스토스' 그리고 '떼오스'가 되었다.
주님, 주는 영원히 주님이십니다. 이러한 Lordship이 우리 안에 더욱 확실해지기 원합니다. 이러한 Lordship으로 우리 믿는 이들이 모두 주인의식을 갖고 살게 하소서. 주를 섬김으로 솔선해서 합당한 길을 걷고 교회를 섬기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