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들은 비교적 착하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어 거듭나도 죄의 본성 때문에 내면에는 마치 가나안 일곱 족속 같은 두려움 억압 유혹 쾌락추구 가증함 등등이 발견되는데, 오늘 말씀에는 유다지파가 가장 큰 땅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부스 족속을 다 쫓아내지 못했으므로 당시까지 공존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여부스 족속만이 아니라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당시까지도 다섯 족속이 남아 있었다 (왕상 9:20-21). 그리고 이들은 노예로 다스렸다. 하나님께서 진멸하라고 하셨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을 이룰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불순종한 것이지만, 이러한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현재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는데, 거듭난 후에도 우리는 죄와 싸우고 또 다스려야함을 보여준다.
롬 6:2에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라고 말씀하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연합함을 통해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말씀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롬 7:24-25 말씀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법적으로는 이제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죄와는 관계없고, 그 정죄함에서 해방되었다. 갈 5:24 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선언하는데, ‘십자가에 못 박다’에 대한 동사는 부정시제 아오리스트를 쓴다. 즉 이것은 과거의 사건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과거 현재 또 우리의 몸의 구속을 받기 전 미래까지도 적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법적으로는 이미 끝났으므로 해방된 문제지만, 내 안의 기질 면에서는 역시 구원이 필요한 이 죄의 문제에 대해, 이미 창 4:7에는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고 말씀한다. 다스려야 하려면 내가 강해져야 하고 권위가 있어야 한다. 내가 강해지려면 훈련을 해야 하는데, 그 훈련은 주님을 떠나서는 할 수 없고, 지속적인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즉 ‘영을 따라 행’하는 (롬 8:4)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