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분배를 마치고 지도자 여호수아도 요구했던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를 받는데, 여호수아가 거기를 택한 것은 아마도 성막이 있던 실로와 가까웠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여호수아는 땅 분배가 끝났지만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임을 분명히 알았다.
모세처럼 자신도 언젠가는 죽을 것을 알았기에 그는 권력에 연연하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성막을 사모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도 여호와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기를 바랐다. 카리스마틱한 지도자는 왕처럼 군림할 수 있지만, 왕은 하나님 한분이면 족하다. 왕의 도성인 수도가 필요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어제 일곱 지파와 일곱 교회를 비교했는데,
아셀 (나는 기쁜자) / 사데 교회 (탈출자 혹은 기쁨의 왕자)
납달리 (경쟁하여 이김) / 빌라델비아 교회 (형제 사랑)
단 (억울함을 풀음) / 라오디게아 교회 (인권, 풍속 혹은 '사람이 다스림')
등으로 연결해 보았다. '기쁜' 아셀은 ‘기쁨의 왕자’ 사데교회와 비교해 보면 로만카톨릭의 여러 부정적인 면에서 '탈출'하여 기쁨을 누린 개신교를 생각나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탈출로 인한 기쁨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로만카톨릭의 여러 비성경적인 면들을 거부하는 것인데, 오히려 개신교는 다시 로만카톨릭의 여러 면모로 돌아가거나 카피해온 것 같아 그 기쁨을 많이 잃었다.
그래서 납달리의 '경쟁하여 이김'이 필요한데, 로만카톨릭 혹은 종교와 경쟁하여 이기는 방법은 모든 의식과 조직 등을 초월한 '형제 사랑'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로써 진정 이기는 자가 된다.
마지막으로 단은 오늘 말씀처럼 받은 땅이 부족해서 '억울함'을 느꼈다. 이에 대해 개역 성경은 ‘그런데 단 자손의 경계는 더욱 확장되었으니 (47절)’ 라고 해서 마치 단의 확장이 매우 고무적이고 진취적인 것 같이 번역했지만, 여러 영번역에는 이에 대해 부정적인 표현이 더 많다. 특히 추가 설명이 되어있는 MSG역에서는 ‘But the people of Dan failed to get rid of the Westerners (Amorites), who pushed them back into the hills. The Westerners kept them out of the plain and they didn't have enough room.’이라고 설명하므로 단이 원래 받은 땅을 아모리 족속에게 빼앗겨서 할 수 없이 먼 북쪽 지역 레셈을 취했음을 볼 수 있다.
북쪽을 편입한 것이 잘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원래 받은 땅을 잃은 것은 결코 잘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단은 억울했고, 인간적인 방편으로 북편을 향했다. 라오디게아 교회 역시 이런 모습을 보이는데,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인간의 조직이나 종교의 힘을 더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에서 떠나 인권이나 사람의 치리를 더 중요시하게 되어 타락한 교회를 보여준다.
주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보이는 것을 주님보다 의지할 때가 많음을 고백합니다. 진리는 참이고 참은 현실이며 이는 주께 속했음을 잊지 않게 하소서. 오직 주께서만 나의 왕으로 다스리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