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말씀 범위를 읽다가 '사역의 재고'라는 말이 생각났다. 어디서 들은 말인지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20여년 전에 읽었던 워치만 니의 책의 제목이었다. 내용은 별로 생각이 나지않지만 제목이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었나보다.
하루 일곱번 기도를 시작한 후 그 중 하나가 '사역'에 관한 것이었다. 이제 전도사를 그만둔지도 벌써 5년이 되어가고 이제는 '집사'라고 불리는 것이 더 익숙해졌다. 하지만 전도사로 섬긴 경험과 청년 때 부터 '사역'에 대한 갈망이 있던 터라 기도 중 하나를 '사역'으로 했는데 그 제목을 '앞으로의 사역'으로 했었다. 하지만 기도하다 보니 진정한 사역은 '앞으로'의 사역이 아니라, 나의 삶 자체에 있고, 그것은 바로 '지금'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참된 사역의 의미를 재고하게 되는데, 사역을 단지 '목회'만으로 정의 한다면 목회자 외에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참된 사역은 내가 나의 힘으로 뭔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하거나 거창한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보내신 자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힘입어 사는 것이 참된 사역임을 알게한다. 그런데 이것을 알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나를 계속 도전하는 나의 종교성이 문제가 되는데, 오늘 말씀 레위 지파의 기록에서 도움을 얻는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특별히 레위 지파를 통해 모든 제사들이 행해졌고 그들은 이러한 종교적 섬김 때문에 다른 지파들이 땅을 경작한 소산으로 먹고 사는 것과 같은 땅의 기업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사는 거주지가 필요했고, 더우기 '목초지'도 주어졌다. 이 '목초지' 즉 짐승을 키우는 땅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두가지 견해를 발견할 수 있는데, 하나는 가족의 부양을 위해 그들도 짐승들이 필요했다는 견해고, 다른 하나는 제사를 위한 짐승들을 키우기 위한 땅이라는 견해다. 두번째 견해가 더 거룩하게 들리지만, 사실 제사를 위한 짐승은 레위인들이 키우는 것이 아니고 각자가 가져오는 것이다. 지난 14장 4절에는 '...다만 거주할 성읍들과 가축과 재산을 위한 목초지만 주었으니'라고 기록하며 이 목초지가 '재산'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모 교단에서는 목사가 되면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야 하기에 이중직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것이 참으로 성경적인가에 대해서는 의심을 금할 길이 없다. 소위 '자비량'으로 섬긴 바울을 특이한 케이스로 보아도 정말 이제까지 역사적으로 영적 지도자들은 일을 하지 않았을까? 만일 이러한 구분이라면 아직도 신약 시대에 레위지파를 세우려는 우스꽝 스러운 모습이 된다.
사역은 '교회일'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더욱 누리고, 나를 잃어 그를 얻으며, 그의 생명으로 사는 것을 사역이라 한다. (음.. 혹시 이 구절은 '사역의 재고'에서 기억하고 있는 부분은 아닐까? 책을 찾아봤지만 못찾겠다.)
주님, 오늘 하루의 삶이 사역되기 원합니다. 저에게 주신 몫을 감당하게 하소서. 형제자매들을 섬기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주님을 더욱 추구하도록 인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