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이 큰 도전과 은혜로 다가온다. 초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생각하니 감동이다.
오늘 말씀 범위가 상황에 대해 모두 설명하지 않아서 내일 분도 읽었는데, 결국 오해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고대 사회 특히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성소를 제외한 다른 곳에서 다른 제사를 지내려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함은 물론 민족 전체에 대한 심각한 도발이 된다. 특히 지형적인 면에서 강으로 분리된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제단을 세웠다는 것은 분명히 오해를 살만한 처사였다. ‘거리도 멀고 강건너기도 힘든데 까짓거 제사를 따로 하면 어때?’ 라는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모든 이스라엘이 매년 세번은 함께 모여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고, 그 명령의 의도는 강 서쪽에 살던 동쪽에 살던, 혹은 나중에 북이스라엘에 살던 남유다에 살던 하나됨을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개역이나 여러 영번역 성경에서는 11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쪽에 제단을 쌓았다’고 번역했는데, 제단을 따로 세우는 것 자체가 큰 문제기는 했지만, 그 위치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요단 언덕이라면 사실 비교적 오해가 적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킹제임스나 히브리 원어에는 ‘이스라엘 건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이해하면 강 동편 세 지파는 제사할 때 마다 강을 건너기가 불편했고 그렇기에 강 동쪽 자신들의 땅에 따로 제단을 쌓아 제사를 하려했던 의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온 회중은 이를 배역이라고 여겼고, 이러한 ‘분열의 문제’ 혹은 ‘하나를 지키는 문제’의 심각성을 알았기에 12절에는 온 회중이 모여 싸우러 가려 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이미 땅 배분이 끝났는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땅을 준다고까지 말한 점이다 (19절). 편리주의에 대항하고 하나됨을 위해 자신들의 이익을 온전히 포기하는 진정한 하나님 백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오늘 교회의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 편리주의에 대항하고 이기주의를 포기하는 참된 주의 백성들이 있는가?
건강한 위기의식 (수 22:21-34)
목회자들 중 가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입시켜서 자신들의 마음대로 교인들을 조종하려는 이들이 있다. 예를 들어 휴거나 7년 대환난, 혹은 개인에 대한 예언 등으로 영적 혹은 심리적인 압박을 주어 사람들을 좌지우지하려 한다. 물론 성경은 그러한 것들에 대해 말씀하고 있고, 또 그에 대해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어찌보면 ‘항상 기뻐함’이 만사는 아닌데, 고후 7:10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말씀한다. 세상 일에 대한 걱정과 근심은 믿음으로 해결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하나님을 다시 앙망하게 하기 때문이다.
어제 말씀에는 요단 서편 지파들이 마치 동편 지파들을 혼내주려고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오늘 말씀 31절에는 ‘너희가 이제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의 손에서 건져 내었느니라’고 말하며 요단 동편 지파들의 의심스러운 행동은 그들만이 벌 받는 문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전체를 치실만한 심각한 것이고, 서편 지파들은 이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을 볼 수 있다. ‘너희들이 하나님 말씀을 어겼으니 이제 너희들만 망해라’ 혹은 ‘너희들은 나쁜 놈들이니 우리가 치겠다’라는 생각이 아니라, ‘너희들 때문에 우리도 죽게될 수 있다’ 라는 공동체 의식이다. 그래서 이는 단지 ‘영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들에게는 매우 현실적인 문제였다.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별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지만, 영적인 문제가 현실로 드러날 때 위기의식이 발동한다.
이러한 공동체적 위기의식은 함께 풀어나가면 건강한 것이 될 수 있는데, ‘위험과 기회’가 동시에 존재하는 ‘위기’라는 말처럼 공동체를 더욱 굳건히 세우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주님, 부정적인 상황을 긍정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은 건강한 위기의식임을 배웁니다. 나만의 구원, 나만의 안전이 아니라, 전체 주의 백성을 향한 주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눈을 주시고, 주의 백성을 향한 주의 사랑을 깨닫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