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를 읽을 때 마다 궁금했던 것은 당시 높은 문화 수준을 영위하던 이방인 로마시민들의 ‘복음’이나 ‘구원’에 대한 보편적 인식 혹은 이해가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더우기 율법에 대한 많은 언급이 있는 만큼 이 서신을 받은 당시 로마 성도들은 아마도 유대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있었을 듯 하다.  아무튼 1절부터 ‘하나님의 복음’을 언급하는데, 복음에 대해 간략한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사랑에 대한 정의도 한 마디로 하지 못하고 많은 구절이 필요하듯, 복음 역시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놀랍고 풍성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영어나 헬라어에서는 1절의 시작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바울’로 시작하는데, 그는 이 서신서를 쓰면서 자신을 먼저 소개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이름 바로 뒤에 ‘노예, 예수 그리스도의’ 라고 기록한다.  어제 ‘여호와의 종’에 대해 나눴지만, 오늘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한다. 

 

자신에 대한 소개는 단 한 절로, 짧지만 매우 강력한데, 어느 신학교를 나와서 학위가 어떻고 어느 교수 밑에서 사사받았으며 얼마나 경력이 많은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받았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택정함을 받았다’의 시제는 완료형이며, ‘위해’는 ‘에이스’ 즉 ‘안으로’라는 전치사를 쓰고 있다.  그에게 있어 복음이란 단지 ‘위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뛰어드는 ‘안으로’의 문제였다.

 

이 복음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미리 약속하신 것인데, 즉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시고 거룩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셔서 능력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아들에 관한 것으로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를 통하여 사도들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다시 ‘에이스’를 쓴다.  즉 ‘믿어 순종함 안으로’ 은혜와 사도직을 받았다.  물론 이 ‘믿어 순종함 안으로’의 주체는 ‘모든 민족’ 이겠지만, 바울에게는 ‘복음 안으로’가 있고 동시에 이 복음 때문에 ‘믿어 순종함 안으로’가 있음을 밝힌다.  나는 복음을 듣고 수긍을 했지만 복음 ‘안으로’ 뛰어 들었는가?  믿어 순종하고 있는가…

 

재미있는 것은 바울은 1절에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6절과 7절에는 같은 단어 ‘클레토이’를 써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 그리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말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부르심’의 주체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다.  복음 안으로, 그리고 믿어 순종함 안으로, 그리고 성도로 부르신 분은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7절로 서신의 안부를 맺는데,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한다.  바울에게 있어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은 예수라는 이름으로 일치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복음도 없고 하나님도 미스테리일 뿐이다.  이러한 가까운 복음이 내 앞에 있다.

 

주님, 주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믿음의 역사가 있게 하소서.  복음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