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말했던 바울은 이제 9절에서는 ‘그의 아들의 복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귀한 말씀, 복된 소식은 사실 그의 아들의 말씀이며 그의 아들에 관한 소식임을 바울은 제시한다.  당시 복음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는 있었겠지만, 아직도 바울은 복음이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하지 않는다.  분명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시지만, 이를 정의하는 것은 로마서 전체를 통해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11절의 ‘신령한 은사 (영적인 은혜의 선물, 카리스마)’를 ‘나누고’ 싶어하는데, 이 역시 무엇인지 지금은 정의하지 않고 단지 ‘어떤’ 것이 있음을 말한다.  답답하기는 하지만 앞으로 로마서를 풀어나가면서 이 모든 것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로마인들을 향한 바울의 간절함 만큼, 그가 나누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 ‘카리스마’는 풍성하다.

 

바울이 로마 성도들을 그리도 보고 싶어하는 이유는 ‘견고하게 하 (11)’고 ‘피차 안위함을 얻 (12)’는 것이었다.  ‘견고하게 하다’의 원어와 그 어원은 ‘서다, 견고하다’ 등인데 건축에 많이 쓰는 단어다.  14, 15장에는 ‘덕을 세우다’는 말이 있는데, ‘집을 건축하다’의 의미이다.  바울은 그의 사역에 항상 목적이 분명했는데, 그것은 고전, 고후, 에베소서, 살전 등에서 계속 등장하는 ‘세우는’ 사역이다.  서기 위해서는 견고해야 하는데, 당시 로마의 성도들은 기본적인 복음은 이해했겠지만, 이러한 견고함이 필요했다. 

 

이러한 견고함은 믿음에 대해 서로에게 안위함을 주는데,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서 믿음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말 내가 믿는 것이 맞는 것인가?  ‘이 길이 참된 길인가?’하는 질문은 하나님을 떠난 악한 세상 속에서 매일을 부대끼며 사는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정상적인 질문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카리스마’를 통해 ‘이 길 밖에는 없다!’를 피차간에 확인하기 원했다.  믿음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17절 말씀처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다.

 

바울의 초기 사역 전략은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를 먼저 영적 전진 기지로 삼는 것이었을 수 있다.  그래서 계속해서 ‘여러 번’ 가고자 했다.  하지만 단지 로마가 정치적 문화적 중심이며 현실적으로 사역이 수월할 것 같아서 그를 동경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는 명확한 정체성이 있었다.  로마가 정치적으로는 막강하지만 문화적인 면에서는 거의 모든 것을 헬라에게서 들여왔듯이 당시 헬라는 문화의 대명사였고, 그에 비해 비헬라권은 상대적으로 ‘야만적’이었다.  하지만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로운 자들이나 어리석은 자들이나 모두 그는 복음에 대해 빚졌고 이에 대해 갚아야 한다는 사명으로 사역했다.  상대적으로 우월하다는 권위 의식이 아니라 빚진 자의 겸손한 마음으로 모든 자들에게 다가간다.

 

그래서 로마이기에 특별한 것이 아니라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했다.  , 그런데 이미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복음을 들어서 성도가 되었을텐데, 또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한다.  이렇게 복음은 풍성하다.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는 말은 현실적인 면에서 복음에 부끄러워할만한 요소가 있게 보인다는 의미로 들린다.  고전 1:22-23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라고 말씀하는데, 메시야가 가장 부끄러운 극형인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바로 이것이 복음의 모습임을 말씀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전하는 것 역시 상식적으로는 부끄러울 수 있지만, 믿을 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선포한다.  이런 비상식적으로 보이는 복음으로 지난 2천년 동안 수 없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돌아오고 자신들의 삶을 바쳤기 때문이다.

 

부끄럽게 보일 수도 있는 복음이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나타나다’는 ‘아포칼룹토’라는 단어로 감추어진 것이 드러난다는 의미다.  그래서 보통 ‘비밀’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기준을 드러낸다.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여러 종교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는 것이 무의미함을 복음은 폭로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는 인간 수준의 ‘행함’보다는 ‘믿음’에 관계된 것임을 17절은 말씀하는데, 그 원어가 재미있다.  억지로 번역한다면 ‘대저 그 안에는 ()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게 되는데, 믿음의 밖으로부터 () 믿음 안으로 (에이스) 이며 대게 믿음의 밖으로의 () 사람은 살고 있을 것이다 라고 기록된 것에 따른다’ 고 할 수 있다.  ‘믿음으로 믿음에’ 라는 번역이 맞기는 해도, ‘으로’라는 부분은 마치 ‘믿음을 가지고 with’로 이해할 수 있는데, 엄밀히 말해서 믿음을 가지고 라기 보다는 ‘믿음으로부터’ 즉 내 자신의 속한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 ( 2:8) 로서의 믿음을 의미한다.

 

같은 문구 ‘엑 피스테오스’가 17절에 두 번 쓰였고, 5 1절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에서도 동일한 문구가 발견된다.  justified by faith justified out of faith라는 뜻이다.  주님께서 빛 비추시고 그를 알게 하실 때, 비밀스러운 그 믿음이 오며, 이 믿음으로부터 이제 ‘내 자신의’ 믿음 안으로 (에이스) 더 깊은 전진이 있다.

 

주님, 믿음이 원래 나의 것이 아닌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귀하고 더 의지할만 합니다.  다만 이제 ‘믿음 안으로’의 순간들이 나의 삶 속에서 이어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