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절은 앞 17절과 비교되는데, 17절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지만, 18절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 아포칼룹테타이'라는 같은 단어인데, 복음을 설명하면서 갑자기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한다. 복음과 하나님의 의, 그리고 믿음은 서로 관계가 있는 것에 비해, 하나님의 진노, 불의, 불경 등도 서로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면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큰 벌이 임할 것을 말씀해야 할 것 같은데, 뒤의 내용은 그렇지가 않다.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면서 소위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지 않는다. 그 보다는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인생들의 슬프고 어설픈 실존을 폭로하고 있다.

갑자기 진화론에 대해 생각이 난다.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믿는 이들의 입장은 어때야할까? '~'이라는 것 자체가 논쟁거리지만, 적어도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믿는다면 진화론은 결코 믿을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성경은 창세기 1 1절부터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분명히 한다. '진화론' 자체가 말이 되지 않기에 너무 방대해져 버렸는데, 그래서 그 중에는 소위 '소진화'도 포함을 시켰다. 그래서 '진화론' 전체를 부정한다고 할 때는 지금도 확인 가능한 '소진화'도 부인하게 되는 형국이 되어서 비난을 받게 되지만, 엄밀히 말해서 빅뱅이나 다위진화론은 하나님을 배제한 논리이기에 결국은 과학적이지도 철학적이지도 않게 되어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버렸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 (20)"다고 하는데, 재미있게도 19절에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고 말씀한다. 다른 곳도 아니고 '그들 안에' 보이셨다. 그들이 한 번이라도 순수한 마음으로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들여다 보고, 추워지면 콧물이 나고 재채기를 하며, 특히 태아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태어나는지에 관심을 갖고 보았다면 이러한 것을 진화의 결과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이들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진노는 큰 벌을 받거나 사업에 실패하거나 건강상 문제가 생기는 등, 혹은 언제 있을지 모르는 '불신지옥'이 아니라, 놀라우신 '하나님의 영광'을 격하하고 전락시킨 것 자체가 그 진노가 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내버려 두'셨는데 (24, 26, 28) 하나님을 떠나면 사람들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울 것 같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을 배제한) 과학을 포함한 지식 그리고 여러 형태의 우상을 섬기게 되고, '정상적'인 관계를 넘어 동성욕같은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게 된다 (24, 26, 27).

궁극적으로는 여러 가지 죄악들이 나타난다. 그 중에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이들 (개역에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로 잘못 번역)'도 있는 것 처럼, 이러한 죄악들은 하나님을 떠난 이들의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남을 보여준다. 그런데 놀랍고 이상한 것은 이들이 하나님을 모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신의 존재는 그 생각 속에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같은 일을 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같은 일을 하는 이들을 기뻐한다. 총체적 타락은 인간의 의지와 지식도 집어삼킨다.

주님, 주님을 떠나면 비정상적인 것들이 정상적으로 보일 수 있음을 배웁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임을 또한 배웁니다. 나의 생각과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영원토록 주님을 높이고 찬양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