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에서 복음을 소개하다가 타락한 세상 및 인생의 서글픈 실존의 문제를 말씀하는데, 복음을 말하기 앞서 이러한 것들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아무 문제 없다. 모두 좋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필요하지도 않고 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2장에서는 갑자기 2인칭으로 '네가'라고 말한다. 이 긴 서신을 읽기 시작한 로마의 성도들은 이 부분에서 갑자기 놀라지 않았을까? 바울은 로마 성도들을 대상으로 지금 묻고 있는 것일까?
복음을 이미 받아서 성도들로 부르심 받은 이들 역시 이러한 말씀을 보며 자신을 뒤돌아봄이 필요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네가'는 로마 성도들이 아니다. 내일 범위 17절에는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라고 말하며 특히 이 판단의 문제, 또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 (5절)'의 문제는 유대인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과 더불어 그리스도를 영접했지만 아직도 유대교의 색채를 버리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 이 부분에서 헬라계 등의 로마 성도들은 '오, 다행이다. 나의 얘기는 아니군' 이라며 안도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1장 후반에 열거된 죄들을 보고 자신들의 상태 역시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특히 '판단'하는 문제를 언급하는데, 선택받았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이나 혹은 '성도로 부르심'을 얻은 이들은 상대적으로 남을 판단하기 쉽기 때문이다.
판단이라는 단어는 '크리노'인데, '분리하다, 뽑아내다, 선택하다' 등이 원래 의미지만, 많은 경우 '심판하다, 판단하다'의 뜻으로 번역이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구절이 마 7:1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이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의 근거와 기준은 결국 하나님의 선한 율법인데, 남들을 비판하지만 율법상 자신 역시 범법하는 것에 대해 변명할 수 없음을 말씀한다.
남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주님께서 금하신 것이지만, '분별'은 필요하다. 고전 2:14-15에는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한다. 14절의 '분별'과 15절의 '판단'은 같은 단어로 '아나크리노'인데, '판단'의 '크리노'에 '아나' 즉 '가운데, 사이에'를 의미하는 접두사를 붙여 '분별'이라는 조금 다른 의미의 단어가 된다.
'판단'은 내가 마치 율법의 주체가 되어 거만하게 된 것이지만, '분별'은 말씀과 나 그리고 다른 이들 간에 관계를 생각하며 옳고 참된 것을 취하고 불의한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비판할 수 있지만 자신은 아무에게도 비판 받지 않는다'라는 뜻 보다는 '영적인 사람 (영을 따르는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해 분별하지만, 자신은 아무에게도 분별당하지 않는다'로 이해해야 한다. 이미 영을 따르고 있는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해 분별하기 때문에 더 이상 분별당할 필요가 없다.
2장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에 대해 1장에서 말한 세상의 타락상을 지나 조금 더 나아가는데, 바로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 (5장)'를 말씀하며 '보응하심' (6절)이 있음도 분명히 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말씀하듯, 하나님의 의는 불의에 대해 눈감고 용서만 하는 것은 아니다. 주께서 악인들을 회개함으로 인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