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어나 라틴어 동사에 특이하게 존재하는 것 중 하나가 '이태동사 deponent'라고 하는 것이다. 동사의 형태는 수동이지만 뜻은 능동인 동사인데, 매우 특이한 동태이다. 어떻게 수동이면 수동이고 능동이면 능동이지 형태는 수동이고 뜻은 능동일 수 있을까?
우리 번역에 '행하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에르가조마이' 혹은 여기에 '카타'를 붙여 '카테르가조마이'가 있는데, 문법상 이태동사를 쓰는 경우가 있다. 9절에서 악을 '행하다, 카테르가조마이'에서 쓰였고, 10절에 선을 '행하는, 에르가조마이'에서 쓰였다. 2장에서 대부분의 동사는 능동이고 7개 정도의 수동태가 발견되고, 이태동사가 쓰인 케이스는 3절의 '생각하다' 15절의 '변명하다' 17절 '의지하다'와 '자랑하다' 22절 '가증히 여기다' 23절 '자랑하다' 등이다.
우리 말에는 피동형 동사는 있지만 수동태는 없어서 보통 수동태는 '~로 되다'로 번역한다. 그래서 로마서의 중요한 내용 중 하나인 justification 혹은 'being justified' 라는 말을 보통 '칭의'라고 번역했지만 이 번역은 매우 아쉬운데, 수동태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일본어는 수동태 투성이다.
아무튼 이태동사가 특이한 것은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그 행하는 면에서는 사람이 능동적이며 주관적으로 보이지만, 선이나 악을 행하게 하는 원동력은 사람의 어떠함 이상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기에 매우 의미있는 형태의 동사로 보인다.
이태동사 중 '악을 행하다'와 '선을 행하다'를 생각하기에 앞서 9절에서 잘못된 번역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각 사람의 영에게'라고 번역된 것의 원어는 '영'이 아니라 '혼'이다. '영'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인간의 가장 깊고 비밀스러운 어떠한 것이기에 영에 환난과 곤고가 있다면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하지만 '혼'은 인성 자체이기에 악을 행할 때 환난과 곤고가 있다는 것은 매우 현실적인 어려움이 된다. 하지만 6절부터 시작된 시제는 미래이기에 현실에서는 악인들이 잘되는 것 처럼 보일 때가 많다.
다시 이태동사로 돌아와서, 9절의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은 '악을 행하게 되는 각 사람'으로도 이해해 보고, 10절의 '선을 행하는 각 사람' 역시 '선을 행하게 되는 각 사람'으로 이해해 보면, 삶의 모든 선행과 악행이 우리 자신에 의해 벌어지는 것 같지만, 여러 상황이나 여건 혹은 관계 속에서 휘둘리며 발생하는 것이 많고, 결국 내 안의 죄로 인해 되어지는 것, 혹은 선행은 그 반대로 성령님의 능력으로 가능함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12-15절의 말씀이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롭고, 이에 비해 율법 없는 이방인들이 본성적으로 선한 일을 할 때 좋은 것이라는 것 처럼 들릴 수 있지만, 결론적으로 그렇게 하는 이들이 없다는 것을 말씀한다 (롬 3:10).
주님, 내 속에 죄가 있습니다. 또 내 안에 주님도 계십니다. 주께서 저를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도록 저의 눈과 생각을 주님 앞에 둡니다. 내가 하는 것이되 또 내가 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배웁니다. 주님이 더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