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절은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고 하는데, 여기서의 ‘믿다’는 능동형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아브라함은 완벽한 믿음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계속 시험 받았고, 하란에서 미적거리다가 육신의 아버지가 죽었고, 약속하신 땅 보다는 계속 남방으로 내려가다 아내를 팔았고, 더우기 믿음대로라면 기다렸어야 할텐데 기다리지 못하고 이스마엘을 낳아 비극의 뿌리를 만들기도 했으며 (.. 정확히는 사래의 말을 듣고), 할례 받은 후에 조차도 아비멜렉에게 다시 아내를 팔았다. ㅠ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기본적으로 ‘믿음이 없지 않았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졌기 때문이다 (20).  ‘믿음이 없어..’ 즉 '없지 않았다'는 부정형으로 쓰인 것을 보면 그의 믿음이 그리 큰 것 같지는 않다.  더우기 ‘믿음으로 견고해졌다’는 것은 원어에서 수동형이다.  즉 그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의 한 면을 보여준다.  나의 믿음 만으로는 부족하다.  사실 처음에는 뭘 믿는지도 잘 모를 수 있다.  하나님의 이끄심과 내 삶 속에서 빛 비춰주시고 힘주심이 있어야 나의 믿음은 견고해진다.

 

21절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역시 수동형인데, ‘확신하게 되었다’라는 의미다.  이것은 아브라함이라는 인물 보다는 그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께 우리의 관심과 눈을 돌리게 한다.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20).

 

재미있는 것은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의 말씀, 즉 믿음의 목적 혹은 주제가 되는 내용은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8)  였다.  영생에 대한 약속도 없고 죄 사함에 대한 약속도 분명하지 않다.  단지 그에게 많은 후손을 주신다는 내용 뿐이다.  하지만 그 의미가 그에게 무엇이었는지 그의 삶을 통해 볼 수 있다고 신약은 말씀하고 있는데, 11:9-10에는 ‘믿음으로 그는 타국 땅에 있는 것같이 약속의 땅에 기거하여 그와 함께 그 동일한 약속의 상속자들인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서 살았느니라.  이는 그가 기초들이 있는 한 도성을 기다렸음이니 그것을 세우시고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니라 (한글 킹제임스).’고 말씀한다.  아브라함은 원래 목축업을 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도 계속 목축업을 했고 장막에 사는, 즉 일시적인 삶의 형태를 취했는데, 그 이유는 (영원히 이주할) 다른 ‘한 도성’이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놓고 보니 뭔가 신비로운 감이 내게 밀려온다.  내가 바라고 원했던 것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에 속한 어떤 놀라운 것이 있음을 알게 하신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4장에서는 아직 분명하지는 않지만, ‘이 세상은 나의 집이 아니네’라는 노래처럼 나는 하늘에 속했음을 느낀다.

 

주님, 이 신비로운 믿음을 더욱 주소서.  제 안으로 믿음 주시고, 그 안으로 믿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