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

10절은 ‘그의 생명 안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될 것’ 을 말씀한다.  복음은 단지 지옥신세 면하고 ‘천당’가는 것이 아니다!!  4영리 보다 더 방대하고, 소위 ‘예수천국 불신지옥’ 보다 정말 깊고 높은 것이 복음이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생명과 관계가 있다.  주님의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그의 생명(조에)으로 우리의 구원되게 하심이다.  그리고 이것이 복음이다! )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음’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제까지 항상 ek라는 전치사를 쓴다.  영어로는 ‘믿음으로’ 라고 할 때 보통 by 혹은 in을 쓰고, 헬라어에서도 en을 쓸 때가 있지만 이제까지 justification의 문제, 즉 ‘의롭다 하심을 받음’ 혹은 ‘수의 (受義)’에 대해서는 항상 ek를 썼다.

 

헬라어에서 ‘~로 부터’라는 말에는 ‘apo’ ‘para’ ‘ek’ 등이 있는데 바울이 계속해서 의의 문제를 다룰 때 쓴 전치사는 ‘밖으로’라는 의미의 ek로서, '행위로' '율법으로' '믿음으로' 등에 모두 쓰였다.  그래서 ek를 ‘~()로’ 라고 번역하면 수단 혹은 방법으로 생각될 수 있는데, 그보다는 ‘~에 근거하여’ 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은 것 같다.  즉 ‘수의 (受義)’ 문제에 대해 그것은 ‘믿음’에 근거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1절은 이것을 더욱 분명히 보여주는데, 원어를 보면 처음에 나오는 단어 ‘의롭게 됨’은 시제가 아오리스트, 인칭이 없이 그냥 복수에 수동태다.  즉 누가 의롭게 되는가에 대한 문제를 말하지 않고 ‘믿음에 근거하여 의롭게 됨’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서 1인칭 복수 ‘우리가’에 해당하는 ‘갖는다’ 즉 ‘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하나님’에 대하여 평안을 갖고 있다 라고 기록한다.

 

재미있는 것은 지난 1:7에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라고 기록하며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님으로 고백한 사도 바울은 5:1에서는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갖는다’라고 말씀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호 떼오스’인데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 1:18)’의 신비로운 비밀에 싸인 하나님을 말씀한다.  이러한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믿음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를 통해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2절이 가능한데, 3:23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지만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위에 즐거워’한다.  ‘즐거워한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원래 뜻이 ‘자랑한다’ 즉 지난 롬 2:17,23에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을 자랑’했던 것과 같은 단어인데, 그들은 행위를 근거해서 자랑했지만 이제는 은혜를 근거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위에 자랑하고 있다.

 

3절로 계속되는 이 ‘자랑함’은 고통 가운데에서도 드러나는데, 고통이 없이는 인내나 연단을 경험할 수 없고 결국 다시 소망을 일구어 내기 때문이다.  지난 장들에서 이 단어 ‘카테르가조마이’는 부정적인 면에서 계속 쓰였다.  즉 동성욕자들의 행위나 악을 행함, 그리고 진노를 이룸 등에 쓰였지만, 이제 같은 단어가 은혜 안에서 소망을 일구는 것에 쓰인다.

 

그런데 ‘소망’이라는 단어가 부끄러울 수 있는데, 소망은 미래에 대한 것이어서 현실적으로는 궁핍하고 어쩌면 궁상스러운 모습으로 살 수 있음을 제시하는 것 같다.  세상에서 화려한 것으로 떵떵거리는 삶이 아니라 물질적으로 쉽지않은 모습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이 소망이 부끄럽지 않은 이유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이다.  행복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다.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하다 해도 마음이 궁핍하면 행복하지 않다.  그런데 성령을 주신 것은 물론 ‘그 하나님의 그 아가페’가 우리 마음 안에 물 붓듯 부어졌다. 

 

우리 마음 안에 부어진 그 아가페는 바로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그의 사랑을 나타내고 계시는 것이다 (현재형).  이러한 현재의 하나님의 확증하고 계심이 있기에 ‘그 하나님의 그 아가페’는 우리 마음 안으로 물 붓듯이 부어진다.

 

8절과 9절을 보면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죄인도 아니고 온전히 의롭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 사실이며 진리다.  하지만 이것은 ‘법적인’ 문제임을 잊으면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우리는 아직도 실수하며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래서 주님의 구원은 우리의 기질면에서 계속된다. 

 

10절에는 처음으로 ‘화해, 카타알라쏘’라는 말이 나오는데, 원 의미는 ‘값 될 만한 것을 서로 교환하다’라는 뜻으로 주님의 죽으심과 우리의 구원을 말씀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단어는 로마서에서는 여기 단 한번 나온다.  주님의 화해하심은 한번으로 족하다.  이 한번으로 다 끝났다!  할렐루야!

 

10절에는 또 다른 놀라운 언급이 있는데 ‘그의 생명 안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될 것’임을 말씀하는 것이다.  아… 복음은 단지 지옥신세 면하고 ‘천당’가는 것이 아니다!!  소위 ‘예수천국 불신지옥’ 보다 정말 깊고 높은 것이 복음이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생명과 관계가 있다.  4장 마지막 절에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말씀했는데, 주님의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그의 생명으로 우리의 구원되게 하심이다.  그리고 이것이 복음이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화목케 하심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하나님’ 즉 비밀스럽고 누구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그 분 ‘안에서’ 자랑하게 한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주님, 고맙습니다!  주의 구원하심은 정말 놀라운 것임을 봅니다.  그래서 소망이 있음을 봅니다.  세상에 눈을 돌리면 짜증나고 남들이 부럽고 내가 부끄럽고 또 우울하지만, 이제 더 이상 죄인이 아닌 신분, 온전히 의롭게 된 저를 봅니다.  담대히 주님의 생명을 취하게 하소서!  이 생명이 저의 구원이고 저의 목표입니다.  오늘 아버지 안에서 자랑하고 즐거워하는 하루되기 원합니다.  이 생명을 삶으로 증인되는 하루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