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현재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옛 사람 아담 안에?  아니면 마지막 아담 안에?  주님의 넘~치는 은혜로 생명 안에서 다스리기를!)

 

생명의 삶 해설에서 주님을 ‘두번 째 아담’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잘못된 말이다.  두번 째 아담은 가인이지 주님이 아니다.  고전 15:45에는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혼 (living soul)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다 (원어 참조)”라고 기록하고 47절에는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 말씀하며 ‘둘째 사람’이라고 분명히 정의한다.  이러한 정의는 매우 중요한데, 주님께서는 옛 사람 아담에 속한 옛 인류를 끝내시고 새로운 사람, 신인류를 시작하셨기에 ‘마지막 아담’, ‘둘째 사람’이 되신다.

 

12절은 신학계에서 ‘대표론’이냐 ‘유전론’이냐로 논쟁하는 문제인데, 나는 둘 다 맞다고 본다.  물론 구약에는 죄가 유전된다고 언급하는 구절은 찾기 힘들다.  하지만 구약에서 말하는 죄는 대게 소위 말하는 ‘자범죄’이다.  이 유전으로 이해할 수 있는 죄는 소위 말하는 ‘원죄’인데, 아담이 선악지식의 나무열매를 먹은 순간 존재 자체가 바뀌어 버려서 후에는 ‘육신’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 6:3).

 

원래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음으로 영생을 누리도록 설계되었지만 죄가 들어와 우리의 DNA는 늙고 병들어 죽도록 프로그램 되었다.  아니 사실은 죄로 인해 원래 DNA가 파괴되고 코드에 심각한 에러가 생긴 것이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선악지식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이다.  그 비밀스러운 열매는 우리의 처음 창조받은 존재 자체를 퇴화시키고 타락케 했다.  DNA자체를 파괴하는 독열매였다.  워치만 니의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는 책에서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라서 죄를 짓는다’는 말은12절을 가장 잘 설명했다.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고 역사적으로 사망이 왕노릇 하였기에 또 다른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야 했다.  인류의 죄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거대한 ''을 보내시지 않고 ‘한 사람’으로 오신 이유다. 

 

16절은 원어로 운율(rhyme)도 있는 느낌이고 구약 히브리 시 특성 처럼 구절 대조도 있다.  아마도 요즘 래퍼들이 들으면 좋아할 것 같다.  중간 부분은 이렇다.

 

가르 크리마 엑스 헤노스 에이스 카타크리마

토데 카리스마 엑 폴론 파라토마톤 에이스 디카이오마

 

오늘 말씀 범위는 계속 옛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을 비교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비교는 현재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19절은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되다’라는 말에 ‘카띠스테미’란 단어가 쓰였다. ‘카타’와 ‘히스테미’의 합성어인데, ‘히스테미’는 ‘서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 역시 로마서에는 단 한번 나온다.  ‘만들다, 세우다, 임명하다’ 등의 뜻이지만 그 느낌은 단지 외형적인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면도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의인이 되리라’는 미래형인데, 이미 그리스도를 믿어 의인이 되었지만 그를 통해 안과 밖 모두가 의롭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 6:23)  사람들에게 ‘당신은 죄인입니까?’라고 물으면 아니라고 대답하는 이들도 ‘당신은 언젠가 죽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어보면 아니라고 답할 이들은 아무도 없다.  죄의 결과가 사망임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죄는 사망으로 다스렸지만, 주님의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고 믿는 이들에게 영생이 되셨다.

 

주님, 죄와 사망을 초월한 의인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을 통해 내 안에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권세를 쓰게 하소서.  상황에 좌절하지 않고 부활의 능력을 살게 하소서.  주님께 붙어있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새롭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