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는 문제는 ‘대하여’의 문제이다. 나의 자아는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장사지냄과 연합했고,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다.)
오래전에 복음 집회나 간증 집회를 가면 가끔 강도나 살인자가 회심해서 목사도 되고 또 전도자도 됐다는 얘기를 듣는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살인 강도 강간 도둑질 사기 마약 등 죄에 빠져 살았지만 이제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는 은혜 안에서 살고 있다는 간증을 한다.
이렇게 래디컬한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는 래디컬한 간증이 있을 수 있지만 태어나서부터 신앙의 가정에서 자란 이들에게는 이러한 간증이 별 도움이 되지도 못하고 오히려 ‘나도 저렇게 죄를 짓고 특별한 은혜를 경험해보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게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많이 짓고 나서 죄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죄인의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자신을 확실히 보게 되면 충분하다. 그래서 소위 모태 신앙인들이 주의해서 봐야할 것은 자신의 신앙의 자태가 과연 종교적인 것인지 아니면 진정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누리고 있는가이다. (사실 ‘모태 신앙’이란 말 자체가 조금 이상하긴 하다. 하지만 한 면으로 침례자 요한이 어머니 태 안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했다는 구절을 읽으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나도 소위 모태 신앙이다. 물론 태아부터 성령이 충만하진 않았지만. ㅎㅎ)
오늘 생명의 삶 제목이 ‘함께 죽고 영원히 사는 신비로운 연합’인데 정말 마음에 든다. 소위 ‘하나님과의 합일 사상’ 혹은 ‘신과의 합일’ 혹은 ‘신성한 연합’ 등의 말은 어쩌면 이교도적이고 뉴에이지 처럼 들릴 수 있지만, 창세기 부터 하나님의 갈망은 창조물 중에서도 인간과의 온전한 연합이었다. 그것이 참된 교제이고 인생의 온전한 목적이다. 그런데 사람이 타락하면서 이러한 하나님과의 신성한 연합을 떠나 ‘자아 확립’ 혹은 ‘자아 극대화’를 추구하려는 심각한 유혹과 혼란에 빠지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인생의 목적은 자신의 어떠함, 자신의 잠재능력을 계발해서 무언가 대단한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죽는 것’임을 강조한다. 2절부터 11절까지 ‘죽다’ ‘죽음’ ‘죽은 자’ 등의 단어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내일 범위까지도 계속된다.
그런데 이 ‘죽는 문제’는 정말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소위 ‘자아의 죽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11절에는 ‘너희 자신을’ 이라고 얘기하는데, 이 ‘자신’은 ‘헤아우투’ 즉 모든 종류의 ‘self’를 의미한다. 이 ‘자아’는 쉽게 말해서는 ‘정욕과 탐심 (갈 5:24)’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 보다 훨씬 더 많다. 사실 선과 악을 포함한 ‘나’의 모든 ‘어떠함’이다. 그래서 믿음은 그냥 ‘동의’가 아니라 ‘중생’ 즉 다시 태어남을 기반으로 한다. ‘허물과 죄로 (영이) 죽었던 (엡 2:1)’ 우리가 다시 사는 것은 동시에 우리 ‘자신’의 ‘죽음’도 함께 존재함을 보아야 하는데, 이것은 주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3, 4절)’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여기에서 ‘세례’의 문제를 말하는데, 세례의 ‘세’는 ‘씻다’의 의미지만, 원어 baptizo는 ‘씻다’는 의미는 없고 ‘침례’ 즉 물에 잠기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죽어서 ‘장사 (4절)’ 지내는 것을 의미하는데, 주님께서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 처럼 우리도 침례에서 올라오는 것은 (물에 잠겼다가 일어날 때)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생명의 새로움 안에서 행하게)’ 하기 위함이다.
6절에서 ‘옛 사람’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어제 말씀에서 ‘아담에 속한 인류’가 바로 이 옛 사람이다. 그 누구도 옛 사람의 범주에서 자유롭지 않은데, 여기에서 자유하려면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 처럼 그 죽으심에 연합해서 죽었음을 알 때에만 가능하다. 결론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인데, 이 죽음은 ‘죄에 대하여 (2절)’ 죽은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꾸 ‘죄를 죽이려’ 한다. 이것이 실수다. 성경은 한번도 ‘죄를 죽이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죄는 율법과 관계되기 때문에 율법을 죽일 수 없는 것 처럼 죄를 죽일 수도 없다. 대신 오늘 말씀처럼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음을 알고,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골 3:5)’는 것임을 말씀한다. 즉 내가 죽는 것이다. 내가 죽을 때만이 진정 죄에서 자유할 수 있다.
이건은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현실에서 적용하려면 11절의 ‘여길지어다’가 필요하다. 외관상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우리가 ‘여겨야 할’ 때가 있는데, 우리 자신이나 다른 것들도 보기에는 바뀌지 않았지만 바로 ‘법’이 바뀌었을 때다. 법이 바뀌면 빨리 그 법에 적응하고 그 새로운 법이 법임을 ‘여겨야’ 한다. 예를 들어 근대 초기에 차도가 처음 생겼을 때는 가운데 차선의 구분이 없었다. 하지만 법이 바뀌고 가운데 차선이 생기면 그 선을 넘어서는 안된다. 그 선 하나가 바로 생명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주님을 믿는 것 역시 ‘법’의 문제임을 다시 생각한다. 바로 ‘죄와 사망의 법’ 그리고 ‘생명의 성령의 법’의 문제이다. ‘죄에 대해 죽었다고 여기는’ 문제는 바로 새로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죽고 부활하실 때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고 부활하시지 않았다. 물론 그의 부활은 주님께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 (1:4)’게 하셨지만 만일 하나님으로서 부활하셨다면 우리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한 사람 (5:19)’ 예수로서 겪으신 것인데 즉 사람으로서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인류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끄신 사건이 된다. 죄의 결과로서 인간은 한번은 죽어야 하지만 (히 9:27),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또 그의 부활하심 안으로 또한 연합하게 한다 (5절).
10절은 ‘그가 죽으심은 죄에게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사심은 하나님께 사심이라’고 말씀하는데, 계속해서 ‘대하여 to’라는 말을 쓴다. 즉 이것은 ‘대하여’에 대한 문제다. 갈 2:20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말씀하는데, 우리는 자꾸 이 말씀을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고 읽는다. 그러면 아직도 ‘내가’ 사는 것이 된다. 이것은 ‘내게’의 문제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기 때문에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하다.
주님, 죄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았음을 보게 하소서. 그리고 온전히 이것을 실제로 여기게 하소서. 오늘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나의 정욕과 탐심은 물론이고, 나의 짜증, 비판함, 교만함, 여러 기질, 말투, 그리고 나의 어떤 어설픈 선함 등을 모두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 놓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십자가로 처리하고 침례로 장사지냅니다. 나는 사라지고 그리스도만 남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