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절은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여 그(몸)의 정욕들 안에서 그(몸)에게 복종 안으로 가지 않게 하라'고 말씀한다. 보통 성경에서 '육신, 사르크스'은 부정적인 것으로 해석되고 그냥 '몸, 소마'은 중성적인 의미지만,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몸이나 육신이나 특별한 구분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아마도 이 몸이 '죽을, 뜨네토스' 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 비해 부활의 몸은 영원한 영광의 몸일 것이기 때문에 그 몸에서 야기되는 정욕들 또한 없을 것이다. 사실 인간의 거의 모든 문제들이 마음과 생각을 통해 몸으로 오는 것 아닌가...
13절의 '무기'로 번역된 단어는 '호플론'으로 무기라는 뜻도 있지만 원래 의미는 '도구'이다. 죄를 짓는 경위는 생각과 마음을 통해 궁극적으로 몸으로 표현된다. 시기나 질투 음욕 등의 보이지 않는 죄도 궁극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몸을 통해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마음에 숨은 죄된 것들이 있을 지라도 몸의 지체들이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죄가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으로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의 팁을 주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명령을 하는 것일까? 이제까지 율법과 믿음을 말해놓고 무언가를 또 '행하라'는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구절은 원리를 말씀하고 있다.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말씀을 하는 것 보다는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이 당연히 살아야할 삶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14절부터 다시 믿는 이들이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을 재확인 시킨다.
순종과 종(노예)의 문제를 말씀하며 우리가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의의 종이기 때문에 우리의 지체를 죄에게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음을 말씀한다. 13절 말씀이 율법을 행하는 것 같은 '행함'의 문제가 아님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난 이들 같이' 하라는 대목이다. 죽은 자들 중에 살아난 이는 주님이시지만, 원어에서는 모두 복수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행함의 문제는 먼저 믿음으로 우리가 온전히 거듭난 자들이며, 앞에서 계속 언급했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일어섰다는 확실한 정체성을 가진 후에라야 가능한 것임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시 율법적인 '행함'으로 이해하면 문제가 된다.
16절은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설명하는데,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한다. '죄, 종, 사망' 하면 상대적으로 '의, 종, 영생'으로 나와야 할 것 같은데, 그 대신 '순종, 종, 의'라고 말씀한다. 즉 이 문제는 거듭 말해 '행함'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순종'함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영생은 '선물'이다 (23절). 그래서 17절은 이 '순종'이 '마음'의 문제라는 것도 추가로 설명한다. 요 3:36에도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말씀하는데, 믿음은 순종에 이르게 하지만 순종 혹은 행함 이전에 믿음이 먼저임을 분명히 한다.
물론 믿음과 행함은 항상 함께 간다. 하지만 우리의 행함이 앞서는 것에 대한 유혹을 우리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지만, 믿음 없는 행함 역시 헛것이고 많은 경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19절은 '몸'이 아니라 이제 '육신'을 언급하는데, 몸은 '죽을' 몸이지만 육신은 '연약'한 것임을 말씀한다. 몸이나 육신이나 모두 행함과 관계가 있다. 몸이나 육신의 행함에 의지하는 것은 매우 정욕적이고 연약한 것이다.
20절은 '종'을 말하면서 특이하게도 '종'과는 어울리지 않는 '자유'를 말하는데, '죄의 종'의 자유는 '의에 대한' 자유라고 말씀한다. 즉 이 자유는 그 열매, 그 마지막을 사망으로 이끄는 (21절) 자유함이다. 방종이다.
22절은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말씀하는데 '열매를 맺었으니'라고 번역된 부분이 원어에서는 '열매를 소유했으니'라고 되어있다. 보통 열매는 '맺는' 것인데, 여기는 우리가 맺은 것이 아니고 단지 소유한 것임을 말한다. 물론 '소유하다'는 능동태로 되어있어서 '맺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 '열매'는 우리가 맺은 것이 아니다. 사실 21절에도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라고 말하며 죄의 종이 되었을 때 얻었던 (소유했던, '에코'로 같은 단어) 열매를 말씀한다. 종 혹 노예는 보수를 받고 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얻는 열매 역시 그 대가나 성과가 아니다. 모두가 은혜로 주어진다.
그래서 23절은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씀한다. 죄의 열매는 허무함과 고통이고 그 마지막은 사망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유하게 하시는 열매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사'로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의 영원한 생명이다!
주님, 고맙습니다. 저로 믿음의 사람 되게 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