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적어도 나의 체험으로는 믿음 생활이 주님을 믿은 후에 온전한 삶을 살은 것이 아니었다.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로마서 7장과 8장을 왔다갔다 하는 것이 실존의 문제다. 이러한 좌절의 이유는 계속 내가 율법의 요구를 이루겠다는 교만의 노력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게 하기 위함이다.)
6장까지는 열매에 대해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다가 이제 7장에서 처음으로 열매를 '맺음'을 말씀한다. 4절은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는데, '이는~' 부터 부분이 원어에는 '이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다른 이에게로 너희가 됨 안으로 (가서), 하나님에 대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다'라고 되어있다. 즉 열매를 맺는 것이 목적이기는 하지만 그 방법은 부활하신 주님에게로 우리가 먼저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함'을 말씀한다. 즉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요 15장 말씀처럼 단지 그리스도께 붙어있는 존재가 되어야 함을 거듭 일깨워 준다.
6절까지 말씀은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났음을 분명히 하는데, 그래서 이제 율법의 묵음 (oldness)이 아닌 영의 새로움 안에서 '노예로 섬겨야'함을 말씀한다. 생각해 보면 율법이 있기 전부터 영이 있었는데 율법이 오래되고 영이 새롭다고 한다. 즉 시간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그 가치와 본질의 차이다. 오늘 만들어진 것이 시간적으로는 새롭지만 하나님과 관계된 것, 혹은 생명과 관계가 없을 때는 언젠가는 낡아지고 헤어진다. 하지만 항상 새로우신 영은 우리로 진정 새로움이 무엇인지 체험하게 한다.
11절은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고 말씀하는데, 죄, 율법의 일부인 계명, 그리고 사망 간의 관계를 설명한다. 즉 율법이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죄가 나를 속이고 죽였다고 한다. 이러한 언급은 의미가 있는데, 율법에서 말하는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런데 죄가 이러한 거룩한 섬김이라는 도구로 무능력한 죄인인 우리를 속였다. '너라면 할 수 있어~' 라고 말하는 듯 하다.
이 죄는 계속 '하마르티아'인데, 하나님을 떠나 목적없는 혹은 목적잃은 인생을 의미하며 인격체로 의인화한다. 13절은 더 자세히 설명하는데, '죄가 드러나기 위하여' '죄로 심히 죄 되게' 등을 말씀하며 율법과의 관계뿐 아니라 죄가 비밀스러운 것임을 설명한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죄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죄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의미다.
로마서 7장 15절 부터는 어떤 면으로 암초가 등장하는 기분이다. 바울은 정말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걸까 아니면 다른 믿음이 적은 이들의 갈등을 대변하는 걸까? 처음에 그리스도 예수를 소개하며 복음을 체험함에 점진적인 진전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게 하지만 갑자기 7장 후반부 특히 마지막 두 절의 탄식은 이제까지 복음의 모든 긍정적인 선포를 부인하는 것 아닌지 의심하게 한다. 마치 '영적으로는 문제 없지만 현실의 삶은 고생이야' 라고 푸념하는 것 같이 들린다. 이중적인 이 삶의 모습이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것 같다... 답은 무엇일까?
15절은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고 말씀하는데 바로 우리의 실존이다. 의지가 약해서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온전하고 완전한 의,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려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의 결론적 탄식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14절에는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의 참모습이 실은 영적이 아니라 '육적'이고 죄 아래에 '팔렸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육적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이 되고 죄 아래 팔렸던 것에 대해 구속함을 입는다는 것에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있다는 것을 보게 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 8장에서 한다.
16절은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라고 고백하는데, '선한'이라는 단어는 '칼로스'로 '최고의, 아름다운, 영광스런, 뛰어넘는, 선한, 귀한' 등의 여러가지 뜻을 담고 있다. 내가 만일 내 힘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다면 율법의 기준은 내가 무시해도 될만큼 낮은 수준의 저급한 것이 되지만, 내 힘으로 지킬 수 없음을 깨달을 때 율법이 과연 하나님의 기준이고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고귀한 것임을 고백한다는 것이다.
개역은 16절이 '시인하노니'라고 번역되어서 17절과 연결되는 것 같지만 원어는 여기서 끝나고 17절은 '그러나 이제는'으로 시작한다. 즉 이제 보니까 이런 모든 범법을 행하는 것이 내 자신이 아니고 내가 팔려간 죄임을 깨닫는다. 관점이 달라진다.
그런데 이 죄가 '내 안'에 있다. 즉 죄는 어떤 사상이나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존하는 살아있는 인격체이고 그것이 사람 안에 존재하며 사람을 의에 대해 무능하게 만드는 실체임을 깨닫는다. 이것은 내가 행한 악에 대한 책임을 죄에게 뒤집어 씌워 전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진정한 이유와 원인을 밝히는 것이다.
그래서 18절에는 결국 '내 안 곧 육신 안에는 선함 (아가또스)이 없다. 원함은 있지만 선함 (칼로스)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찾지 (휴리스코) 못함을 깨달았'음을 고백한다. 21절에도 '찾다, 휴리스코'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발견한 것이 '법'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법은 선(칼로스)를 행하려고 할 때 악 (카콘)이 함께 한다, 즉 선을 추구하면 할수록 악이 함께 따라 붙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임과 동시에 '법'적인 문제다. 즉 법에 대한 것이므로 이것을 해결하는 문제는 역시 법적인 것임을 제시하고 있다.
최고(칼로스)의 '하나님의 법'이 있고, 내가 그것을 지키고 싶어하는 '마음의 법'이 있는데, 지체 속의 한 다른 법 즉 '죄의 법'은 나의 '마음의 법'보다 강한 상위법이기 때문에 싸워 이겨서 나를 사로잡는다.
이렇게 마음은 있지만 꼼짝달싹 못하는 나이기에 나는 곤고하고 비참하며 소망이 없음을 개탄한다! 그런데! 그래서 탈출구를 찾는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고 탄식하며 '몸의 구속'을 구하고 있다. 실존의 문제는 말 그대로 역시 '몸의 문제'임을 말씀한다. 이러한 물음에 답은 바로 나온다. 다른 답이 없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런데! 정말 7장은 그런데의 연속이다. 물론 원어에는 '그런데'는 없지만 '아라, 결과적으로' 라고 하며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고백한다. 이 부분은 정말 튀어나온 암초같은 구절이다. 믿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죄에서 해방되며 더 이상 죄를 짓지도 않고 과거의 모든 상처를 치유를 받으며 더 이상 걱정도 없고 유쾌케 (행 3:10, 개정) 되는 날이 올 것 같은데, 정작 현실상 육신으로는 아직도 죄의 법을 섬긴다는 것이다.
로마 성도들 중에 믿음 생활을 하며 의심이 드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주님을 믿으면 소위 '만사형통'하고 하나님의 모든 부요하심이 현실에서 적용될 것 같았는데, 살아보니 녹록지 않다. 정말 영생을 이루고 있는 것일까? 정말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 하나님의 약속은 참된 것일까...?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들이 항상 평안하고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다'라고만 약속하지 않으셨다. 주님의 은혜를 알면서도 아직도 '내가' 무언가 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겠다는 생각은 나의 죄됨을 폭로하기만 한다...
주님, 아침부터 실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선은 정작 하지 못하고 이렇게 실수만 하게 되네요. 이것이 내 안의 죄의 문제임을 깨닫습니다. 성도들 간에 서로 힘이 되어야 할텐데 적지 않은 경우 서로에게 시험과 짐이 되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사건들을 통해 자신들의 무기력함을 확실히 보게 하시고, 주님께로 향하는 기회로 삼게 하소서. 현실에서 나의 몸은 죄의 법을 섬기는 노예임을 봅니다. 죄라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그 이상임을 보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러한 실존의 문제에 대한 답은 결코 끊임없는 노력이 아니라 그 안을 확실히 보고 인정하며 주를 의지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이 사망의 몸이 그날에는 온전히 구속됨을 입고 주님과 같이 될 것을 기대하며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