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위치적으로는 로마서 중간 부분에 있고, 내용면에서는 복음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되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원리면에서도 생각할 부분이 있다.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1절은 바로 앞절 7 25절을 연결시키는 것이라면 ‘그러나’로 되었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므로’라고 시작하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7장에서 ‘그러므로, 아라’를 쓴 구절들은 3, 21, 그리고 25절인데 그 내용을 보면 모두 ‘법’을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법에서는 논리가 중요한데, ‘그러므로’는 논리를 나타내는 말이다.  밑도 끝도 없이 그렇다가 아니라 ‘그러므로’ 즉 분명한 이유와 증거가 있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1절에서 이 ‘그러므로’가 말하는 것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지만, 그 이유가 바로 2절의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기 때문임을 말씀한다.  할렐루야!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두 가지 법을 언급하고 있다.

 

또 개역에는 없는 구절이지만 소위 ‘어떤 사본에는’ 있는데 적어도 내가 보는 헬라어 사본의 나머지 구절을  한글킹제임스에서는 ‘그들은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행하느니라’고 번역했다.  2절에서 법적인 문제를 밝히는 한편 정죄함이 없는 이유가 ‘육’과 ‘영’에 대한 문제라는 것이다.

 

먼저 법적인 문제를 보면, 어제 말씀 ‘마음의 법’보다 ‘죄의 법’이 더 강해서 나를 사로잡았음을 보았다.  하지만 ‘죄와 사망의 법’ 즉 ‘죄’와 ‘사망’은 같은 것임을 보는데, 이 강한 법보다 더 강한 최상위 법이 있다.  그 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데, ‘생명의 영의 법’이다.  ‘마음’이 있고, ‘육’이 있고, ‘죄와 사망’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법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견되는데 그것이 ‘생명의 영의 법’이다.  원어에는 ‘하기오’ 즉 ‘성’이라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성령’의 법 보다는 ‘영의 법’이 더 맞다.  왜냐하면 앞으로 계속 영을 따라, 영의 생각, 영 안의 등의 말씀을 언급하기 때문이다.

 

1절을 다시 생각해 보면 ‘그러므로 (법적으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법적으로)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읽어보는데, ‘정죄’라는 단어 역시 법적 단어이다.  ‘판단’이라는 ‘크리마’에 ‘카타’를 붙여서 ‘카타크리마’라는 단어인데, ‘카타’는 ‘밑으로, 통하여, 의하여, 함께’라는 여러 뜻을 담고 있지만 ‘크리마’와 함께 붙으면 ‘밑으로’의 의미가 강하다.  즉 ‘판단’을 하는데 ‘밑으로’ 한다.  정죄한다.  하지만 누구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이러한 정죄가 통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 자체가 영을 따라 행하는 것인데, 영을 따라 행할 수 있는 것은 법적으로 이러한 문제에 대해 완전히 해방되었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이러한 새로운 최상위법이 적용된다.  해방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