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것은 3절에서 ‘율법이.. 연약’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6:19에서는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다고 했지만 여기서는 율법 자체가 연약하다고 한다. 특히 육신으로 말미암아 (통하여) 연약한데, 율법 자체는 거룩하지만 불완전한 것임을 말한다.
개역은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이라고 했는데 무슨 말인지 빨리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글 킹제임스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원어에 가깝게 번역이 되었다. ‘율법이 육신을 통하여서는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 그 육신에 죄를 선고하셨으니’라고 했는데, 다시 번역하면 ‘율법이 육신을 통하여서는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죄의 육신의 모양으로 ('죄 있는'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을 보내 죄에 대하여는 그 육신 안의 죄를 정죄하셨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육신’은 아들의 육신이 아니라 그냥 일반 ‘육신’으로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아들의 육신’이라면 원어에서 ‘아우투스’를 써야했는데 그냥 ‘그, 테’를 썼기 때문이다. 즉 주님의 죽으심은 모든 ‘육신’을 대표해서 정죄하셨음을 말씀한다. 그래서 주님께서 죽으실 때 우리도 함께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8장에서 계속 나오는 단어는 ‘육’ ‘영’ 이 많지만 이들 앞에 계속 ‘카타’가 붙는다. 즉 여기에서 카타는 ‘따라’를 의미하는데 ‘영’ 혹은 ‘육’이 복음을 체험하거나 그렇지 못하는 열쇠 혹은 비밀임을 말씀한다. 그런데 더욱 비밀스러운 것은 바로 ‘생각’으로 번역된 ‘쁘로네마’라는 것이다. 영도 있고 육도 있지만, 이 둘 사이에 선택하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쁘로네마’임을 말씀한다. 육을 따라 혹은 영을 따라 ‘행하는’ 문제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5절의 동사형 ‘쁘로네오’는 ‘이해하다, 지혜롭다, 느끼다, 생각하다, 생각을 조정하다’ 등의 뜻이 있는데, 그 어원이 ‘쁘렌’ 즉 ‘생각’에 해당하는 단어이기에 ‘생각’으로 번역을 많이 했다. 명사형 ‘쁘로네마’는 ‘마음의 생각이나 목적’의 의미지만, 영어 번역에서는 ‘disposition’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즉 우리 안의 생각이나 기질 등 마음의 추구함을 가리킨다. 영 혹은 육을 따르는 문제가 바로 마음과 생각과 무언가를 추구하는 우리의 기질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5,6절은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말씀하는데, 바로 이미 우리 앞에 놓인 복음이 어떻게 우리 삶 속에서 체험될 수 있는가에 대한 방법을 말씀한다. 복음을 받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실행적인 면에서 ‘육’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르는 생각, 영적인 생각과 마음과 기질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을 주님께서 주시기를!
놀라운 것은 다음 7,8절인데,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단언한다. 계속 보아왔지만 ‘육’은 연약함을 (할 수 없음) 잊어서는 안되는데, 기본적으로 육신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는다. 최상의 법이 이미 존재하지만 육은 그 법을 지킬 힘도, 의지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무시해 버린다. 마치 교통 법규를 무시하며 난주하는 차처럼 언젠가는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사망에 이르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무엇을 하든, 선을 행하는 것 조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무능하다. 그래서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영이 실제적인 실재이다.
주님, 눈에 보이는 실재가 실재가 아님을 배웁니다.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영과 진리(실재) 안에서 (요 4:24)' 해야 함을 기억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집회나 의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귀한 진리의 복음을 체험하며 살아내는 오늘의 삶 되게 하소서. 영을 따라 생각하며 행하는 오늘로 주님 축복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