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복음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영 안에서 생명을 얻고 신분이 바뀌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음을 보여준다.)

 

어제 말씀 3절에는 ‘…자신의 아들을 보내 죄에 대하여는 그 육신 안의 죄를 정죄하셨다’ 라고 말씀하는데 ‘죄가 ‘육신 안에 있고, 를 ‘정죄 (혹은 심판)’하셨다고 말씀했다.  곧 이어 4절에는 그 이유가 나오는데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함인데, 이 ‘요구’는 원어로 ‘의’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의의 요구’라고 번역할 수 있다.  육신 안의 죄를 정죄하신 것은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이루기 위함인데, 그 요구의 결과는 죽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이루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결국 우리로 ‘그 영을 따라 행하’기 위함이다.  이 문제가 오늘 말씀에 더 자세히 선포된다. 

 

성경에는 ‘크리스천’에 대해 정의하는 곳을 찾기 힘들지만, 9절에는 ‘크리스천이 아닌 것'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는데 뒤바꾸면 그리스도의 사람, 즉 크리스천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이다.  앞 부분에는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이라고 말씀하는데 바로 이어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분명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재미있는 것은 여러 번역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라고 했는데 원어에서는 (자꾸 원어를 들먹거려서 죄송하지만 그래도 중요하기에)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음을 먼저 말하고 그 다음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이 나온다.  여기에 쓰인 ‘만일’ 이라는 단어는 바로 뒤에 오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만일 에이 ei’)’과는 다른 단어로 eiper인데, ‘만일 그러므로, 만일 결국에는’ 즉 만일의 결과를 보여준다. 

 

바울은 이 부분에서 믿는 이들의 영적 실체를 말씀하는데, 이미 우리가 믿음으로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영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신다고 증거한다.  창세기  6:3에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육신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해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영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 이것은 전율할 문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크리스천은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이다.  그 영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10절에는 이상한 말씀을 한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으면 우리 ‘육신’이 아니라 우리 ‘몸’도 살리셨으면 좋겠는데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라고 한다.  사실 살아있어 보이는 우리의 몸은 언젠가 한번은 죽을 것이기 때문에 죽은 것과 다름 없다.  영의 살아있음은 우리의 죽는 (사망의, ‘죽을이라는 미래형이 아님) 몸도 살리시는데, ‘살리는 것은 영’이기 때문이다.  즉 사는 주체가 영이 되고 동시에 이 영은 몸도 살린다.  이것이 11절에 있는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 즉 하나님의 영이 일으키셨음을 말씀한다.  이러한 진리는 예전에는 단지 믿음으로만 취할 수 있었지만 요즘에는 ‘클론’이니 ‘인간게놈’이니 하는 것으로 이러한 말씀이 허황된 것이 아님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전에는 육신에 대해 채무자들이었지만 (그래서 그 하자는 대로 끌려갈 수 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영 때문에 더 이상 그렇지 않고 (12), 만일 육신을 따라 살아간다면 지금 삶에서도 사망을 경험할 것이지만 (현재형), 영으로 몸의 행실들을 죽음에 놓으면 살게 될 것임을 (미래형) 말씀한다. 

 

그리고 나서 정말 놀라운 말씀으로 이어진다.  ‘누구든 하나님의 영으로 이끌림 받는 이 사람들이 (후토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라고 말씀하는데, 하나님의 영으로 이끌림 받는 사람들이 어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these, 후토이 즉 여기 이 사람들, 즉 가까이 있다고 하며,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선포한다.  이 말씀은 어떤 면에서 혼돈을 줄 수도 있는데, 다음 구절의 ‘아빠 아버지’에 대해 많이 들었지만 이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하셨는데, 그것에 대해 아무도 토를 다는 사람이 없었다.  아마도 유대인들의 선민 사상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여겼는지도 모르지만, 그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독생하신 아들’이신 예수님 외에는 없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때 마다 돌로 치려고 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하나님의 영으로 이끌림 받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선포한다!  복음과 구원은 단지 속죄만이 아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아들로 이끄신다.  이제 더 이상 예수님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라고 기도하지만 그 의미를 잘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은 살아계시고, 그 분의 동일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생명을 통해 우리가 거듭났기 때문에 우리 인간으로 하나님의 아들들 되게 하신다!  그래서 주님은 영원히 유일하게 ‘독생하신, 모노게네’ 아들이시지만, 우리는 그 분을 통해 이제 하나님의 아들들된다!  할렐루야!

 

그래서 15절은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음을 말씀하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비밀은 다시 ‘영’에 있고, ‘양자의 영’이라고 한다.  ‘양자’라는 말이 ‘입양’이라는 말을 연상하게 해서 특히 혈육을 중시하는 한국인들에게는 가깝게 와닿지 않은데, 사실 ‘양자’라는 단어보다는 ‘아들됨’이 더 맞다.  원어는 ‘휘오떼미아’인데, 아들인 ‘휘오’와 ‘두다, 만들다, 세우다’의 ‘티떼미’의 복합어이다.  즉 ‘아들로 세움’인데, 여기에는 두가지 면 즉 ‘법적인 면’과 ‘생명적인 면’을 세운다.  보통 입양은 법적인 면까지만 가능하지만, 하나님의 입양은 법적인 면에서는 물론 ‘영’으로 ‘생명’까지 하나님과 전혀 다르지 않은 온전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낳게 하심으로 우리로 하나님 아들 삼으셨다.

 

16절에는 재미있는 구절이 나오는데 원어에는 “그 영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함께 증거, 쑤마르투레이’하신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그 영 (토 프뉴마)'이 있고, 우리의 영 (프뉴마티 헤몬)이 있다.  우리의 영도 원래 창세기의 하나님의 ‘숨’이었으니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우리의 영이 다시 살아날 때 (regenerate) 그 영과 더불어 같은 증언을 한다.  둘의 증거가 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는데, 하나님의 그 영과 우리의 영이 한 증거를 증거한다.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자녀다!

 

17절은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는데 생명의 문제 즉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부요하심을 상속받는 상속자임을 말씀한다.  ‘은도 내것이요 금도 내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온 우주의 창조자요 소유자이신 하나님의 상속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여기에 다시 9절의 ‘eiper’가 쓰였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만일 그러므로 결국에는 (현재에는) 고난을 함께 받고 있고, 함께 영광을 얻게됨 (아오리스트 시제)을 분명히 한다.

 

주님,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단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법적인 문제의 해결만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되게 하시는 놀라운 비밀이 있음을 배웁니다.  같은 영 안에서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이며 함께 한 상속자이며 함께 고난받고 함께 영광 얻게됨을 잊지 않게 하소서.  오늘 내주하시는 그리스도, 내 안에 집을 만드시는 주님께 주목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