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들로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상속자라면 영광을 얻게 됨과 더불어 현재의 삶에서는 고난을 받음을 17절에서 말씀했다. 그런데 왜 현재에서 고난을 받을 수 밖에 없을까? 보이는 것을 좇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 사는 것 자체가 고난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성화는 현재 받는 고난을 통해 인내를 배우며 순종함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5:-9 에는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라고 말씀한다. 순종없는 성화 없고 고난 없는 순종 없다 (빌 2:5-11).
그래서 소위 번영신학의 가장 큰 맹점 중의 하나가 우리로 성화와 멀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어제 고난을 통과했는가? 그 가운데 주님을 구했는가? 주님의 도우심과 임재하심을 구했는가? 그렇다면 그만큼 성화한 것이다. 성화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거룩하게 하시는 주님의 생명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주님의 피로 거룩하게 되었지만 (히 13:12), 우리 삶 속에서 또 우리 기질 안에서의 성화는 고난을 통과하며 인내를 통해 주님을 갈망할 때 이룬다.
물론 고생한다고 모두 성화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고난을 인내와 순종과 성화의 기회로 삼는다면 유익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냥 생고생이나 재수 없는 일들로 끝난다. 사실 주님과 관계 없는 고생도 사람을 어느 정도 성숙하게 한다. 세상적인 성숙 혹은 철이 드는 것과 우리의 성화가 다른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자란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생명을 적용해야 한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자녀들’이었지만, 주님의 생명으로 자라면 ‘아들들’로 성장한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나 모두 상속인의 신분인 ‘아들들’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말씀 18절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한다. 진정한 영광인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 항상 있는 ‘아들들’이 되기 때문이다.
19절은 복음의 또 한 면을 보여 주는데, 복음은 우리 영과 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몸은 물론 아담의 죄로 저주받은 모든 피조물을 회복한다. 이를 위해 요구되는 것이 다시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이다. 복음이 이 땅에 온 것은 시간적으로 이미 2천년도 더 지났다. 2천년이면 사실 정말 오랜 시간이다. 고대사가 항상 논란거리인 것은 정확한 기록이 없으면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인데, 고대사는 고사하고 며칠 전 일도 제대로 기록하거나 녹화하지 못하면 알기 힘들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벌써 2천년 전에 오셨다. 시간이 지나도 너무 지났다. 그 이유는 몇 가지 있겠지만 그 중 확실한 한 가지 이유가 바로 ‘이방인의 수가 채워지는’ 것과 더불어 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이다. 주님의 재림의 시간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께 달려있지만, 그 시간은 바로 위의 두 가지와 맞아 떨어지는 시간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피조물의 먹이 사슬은 타락 후의 혼돈이다. 첫 사람 아담의 죄 때문에 피조물들은 ‘허무한데 굴복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 까지는 피조물들도 그 굴복하는 상태에 두셨다. 원어에서는 20절 후반부에 “소망 위에 굴복하게 하셨다” 라고 기록한다. 피조물들이 말을 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탄식하고 있지만, 말을 할 수 있다면 ‘빨리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소서! 우리가 너무 괴롭습니다!’ 라고 외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때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이사야 11:6-8에는 회복의 그 날에 피조물들도 회복될 것임을 말씀한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개인적으로 여기에 하나 더 넣자면 ‘그 때에 모기들이 더 이상 내 살을 물고 피를 빨지 않을 것이요 대신 나를 위해 자장가를 불러줄 것이다’ 라고 하고 싶다. ㅎㅎ 지금 피조물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기를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당하며 기다리고 있다 (22절).
23절은 ‘그러나 그 뿐 아니라 그 영의 첫열매를 소유하고 있는 우리도 우리 안에 탄식하며 아들됨을 기다리는데 우리 몸의 그 해방(구속) 이다’ 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아들들이 되는 때는 우리 몸의 해방 혹은 구속 (redemption)이 될 때다. 즉 부활의 몸으로 입기 전에는 우리가 아들들로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속으로 탄식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손을 놓고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의 첫열매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 첫열매는 마치 보증금 같아서 앞으로 누릴 모든 영광을 소망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이 ‘기다리다, 에끄데코마이’는 ‘밖으로, 에크’와 ‘받다 취하다, 데코마이’의 합성어인데, 무언가 받게되고 또 그것을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24절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원어에서 이 시제는 아오리스트인데,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완전한 구원, 즉 몸의 구속을 얻는 것은 우리의 삶을 통해 소망으로 가능함을 말씀한다. 그래서 인내를 통해 기다리고 있다 (25절).
주님, 기다린다고 하면서 그냥 시간만 때울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지만 또한 그 믿음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그 소망을 붙잡음으로 구원의 이룸을 얻음을 배웁니다. 아직 보이지 않는다고,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고 좌절하지 말게 하소서. 오히려 더 큰 소망을 얻도록, 우리가 소유한 그 영의 첫열매가 우리 안에서 더욱 확실해지고 분명해지게 하소서. 믿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소망으로 인내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