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우리가 연약한 것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할지 모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을 접하고 나서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었을때 도무지 무엇을 기도해야할지 몰랐다.  단지 그냥 엎드려만 있었다.  하지만 내 속에 깊은 탄식이 있었음을 안다.  많은 경우 사건의 내막이나 사람들의 진실을 모르고 기도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하지만 단지 무릎을 꿇을 때 그 영께서는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

 

27절이 좀 헛갈린다.  원어에서는 ‘그런데 마음들을 살피시는 분이 () 영의 쁘로네마 (생각, 기질, 성향)를 아셔서 성인(성도)들을 위해 하나님 (의 뜻)에 따라 간구하고 계시다’ 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영’은 ‘성령’인 것 같기도 하지만 문장을 보면 ‘마음들을 살피시는 분’이 성령이고, 여기의 ‘영’은 우리의 영 (16)인 것 같기도 하다.  ‘마음들’은 복수지만 ‘영’은 단수인데, 성령 하나님께서는 모든 마음들을 아시고 살피시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고 계실 때는 각 영을 위해 개인적인 쁘로네마에 따라 맞춤 간구를 하신다.  얼마나 우리의 연약함을 개별적으로 도우시는지!

 

28절은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한편 도전을 주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을 말씀하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셔서 복음을 받고 거듭난 이들은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가페 사랑하는데,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아가또 선을 이룬다.  모든 상황과 사람들과 시간이 들어맞아서 아름다운 결과를 이루는 것을 체험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고 결국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는데, 이러한 체험을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고 동시에 하나님을 아가페 사랑해야함을 말씀한다.

 

이제까지의 ‘아는 것’은 ‘오이다’로 ‘인식하다, 이해하다’의 뜻이지만, 29절 하나님의 ‘미리 아심’의 아심은 ‘그노시스’이다.  하나님의 아심은 온전히 아시고 또 미리 아심이다.  전지전능하시다.  미리 아시고 또 미리 정하셨는데 이는 우리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다.  ‘본받다’는 ‘숨몰포스’인데 ‘함께() 모르포스 (형상 혹은 모습)’ 이다.  믿는 이들이 본받을 형상은 그리스도시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이제 더 이상 혼자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신다. 

 

29절과 30절의 대부분 동사 시제가 아오리스트인데, 그래서 30절은 ‘하셨느니라’고 하는 것 보다는 ‘하시다’ 라고 하는 것이 느낌에 더 맞다.  이 아오리스트를 현재에 적용하고 체험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영에 있다.  ‘또 그들을 미리 정하시다 또한 부르시다 부르시는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다 의롭다 하시는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시다!  크로노스 시간 안에 그 순서는 분명 있지만 아직 영화롭게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금 내가 어디 있느냐는 그 영 안에 있느냐에 달려있다.  영 안에서 영화롭게 하신 것을 미리 보고 체험한다.

 

31절부터는 갑자기 내용이 바뀐다.  결론적으로 39절에는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말씀하는데, 로마서가 쓰여진 것을 잠간 생각해 보면, 로마서는 고린도에서 주후 59년에 쓰였고 그 다음 해에는 드디어 바울이 로마에 입성한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로마 감옥에 갇히고 옥중 서신을 쓰고 후에 순교한다.

 

당시 로마는 네로 황제가 다스리고 있었고 기독교 혹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어떤 이들은 요한복음이 헬라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로마서도 헬라 이원론을 바탕으로 혹은 그에 대해 썼으며 특히 영지주의 이단에 대적해 쓴 것이라고 하는데 여러가지 것들이 혼합되었던 로마의 문화를 보면 이해도 되지만 8장의 여러 군데에서 ‘영’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 모든 것의 열쇠는 ‘영’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37절은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즉 ‘넉넉히 정복함’을 말씀한다.  바울은 이 서신을 쓰고 로마에 간 후 옥에 갇히고 혹독한 로마 감옥에서도 이러한 말씀이 거짓이 아님을 체험하고 증거했다.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그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음을 발견했다!

 

주님, 그 영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께 인도하시고, 그 형상을 본받으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 혹은 아가페 사랑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발견하게 합니다.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 받아도 영 안에서 평안을 누리기 원합니다.  오늘 이 넉넉히 이기는, 정복하는 체험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풍성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