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회심 후에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그들이 듣지 않자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 13:46)’ 또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 18:6)’고 선포하고 이방인들을 위한 전도자가 되었다.  바울이 만난 그리스도는 너무도 분명하고 구약의 모든 말씀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데도 유대인들이 믿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은 너무도 답답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홧김(?)’에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전도 대상을 바꾼 것 같이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방을 위한 전도자로 세우셨다.

 

바울은 그 마음 깊은 곳에 간직했던 속내를 토로하는데 이방이던 로마인들에게 쓰는 편지에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3)’고 고백한다.  ‘예정’에 대한 비밀을 말한 바울이 ‘유대인들은 예정받지 못해서 할 수 없다’라고 하지 않고 그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온다면 그 대가로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 라고 말한다.  물론 가능한 일도 아니고 바울은 그리스도도 아니기에 자신이 끊어짐으로 유대인들이 구원받는 따위의 일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고백하는 바울의 마음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마음임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이 끊어짐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받는 것을 구하는 것은 구약의 모세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출 32:32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만든 후에 모세가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라고 기록하고 있다.

 

얼핏보면 모세나 바울이나 ‘민족애’가 강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우기 구약의 일시적인 복의 개념에 비해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은혜를 저버리는 당시 유대인들에 대한 바울의 마음은 아마도 애가 끊는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족애’ 전에 모세나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이 더 중요한 문제였다.  9:28에서 모세는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내신 그 땅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일 만한 능력도 없고 그들을 미워하기도 하사 광야에서 죽이려고 인도하여 내셨다 할까 두려워하나이다”라고 하나님께 아뢰는데, 그의 관심은 이스라엘 백성의 안전 이전에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에 있었다.

 

그래서 바울 역시 자신의 형제나 골육의 친척의 구원에 대한 깊은 갈등보다도 ‘하나님의 말씀 (6)’이 더 중요한 문제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 (4,5)’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생명적인 면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들 됨이 없었지만 법적인 면에서는 그 위치가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풍성한 것을 소유한 그들이 이제 구약의 본질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자 그를 외면하고 죽였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데 그 약속의 대상의 상태가 불투명해졌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이 ‘육신적인’ 면이 아니라 ‘약속’에 대한 면임을 말씀한다.  사실 출애굽 당시 애굽을 떠난 백성들 모두가 아브라함의 직계 자손들은 아니었고 이방인들이 포함되기도 했다.  더우기 그 이전 이스마엘 같이 언약과는 상관없는 자손들도 있다.  그래서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고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 (11)’심을 본다.  그러면서 13절에는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말씀한다.  이러한 언급은 믿음 없는 이들이 오해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대해 빈정거리게 할 근거를 줄 수도 있지만, 믿음이 있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에 대한 기준이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한다.

 

공동체 안에서 누가 더 크냐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교회 안에서 섬기는 이들을 주님께서는 교회에 선물로 주셨다.  정말 주님의 교회가 각 지역에서 공동체로 선다면 각 개인의 믿음이나 상황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받으시는 것이 제일 중요한 과제가 된다.  공동체가 힘들어질 때, 가정에 시험이 올 때, 다시 평안을 찾게 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 되고, 이에 따라 하나님께 구하여야 함을 보여준다.

 

주님, 상황적으로 잘 되는 것에 관심을 갖는 저를 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보며 그것을 붙잡기를 배우게 하소서.  바울의 고백은 교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각자의 필요도 있고 여러 관계 속에 문제들도 있겠지만,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던 하나님의 주권에 순복함으로 우리도 같은 고백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