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또 우선은 하나님이다.  자꾸 까먹는다.

 

어제13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는 말씀을 읽고 나면 ‘아니 그럼 무슨 얘기야?  하나님이 편애 하신다는 거야?’ 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들 수 있다.  그런 질문이 바로 14절인데, 만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거라면 사람에게 무슨 책임이 있느냐는 질문이다. 19절 역시 같은 맥락의 질문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뒤의 구절들이 나오는데, 논리적으로 보면 이해가 안되는 문제도 아니지만 왠지 뭔가 캥긴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성경 말씀일까?  물론 한 영혼을 사랑하시지만 그런 구절은 성경에 없다.  ‘천하보다 귀한 목숨’의 주체는 각 개인이지 하나님이 아니시다.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의 말씀은 하나님이 한 사람의 목숨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같은 말씀이 막 8:36과 눅 9:25에도 나온다.  오히려 주님은 이렇게 각 개인에게는 천하보다 중요한 목숨을 주님을 따르기 위해 버리고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한다 ( 8:35, 9:24).  (이제 부터 기도할 때 '천하보다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 이라고는 하지 말자 ㅎㅎ)

 

물론 마 6:26에 공중의 새를 비유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말씀하셨고, 18장과 눅 15장에는 아흔아홉 마리 양을 산에 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으시는 목자의 사랑도 말씀하셨지만 결론적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그런데 오늘 말씀 범위를 읽으며 왜 서운한 마음 혹은 뭔가 캥기는 마음이 들까?  잘 생각해 보니 그것이 바로 내 안에 있는 죄성임이 발각된다!  이에 대해 바울은 20절에 “(과연 확실히) 오 인생이여, 네가 누구이기에 하나님께 반문하는가!” 라고 묻는다.  길어야 백년 사는 짧은 인생, 극히 제한된 지식을 가지고 살다 마감하는 안개같은 인생이 감히 영원토록 절대자이신 하나님에 대해 왈가왈부하려 한다.  8장까지 모든 내용을 읽었으면서도 여기에서 마음이 캥기는 것을 보면 내 안의 죄성은 정말 끈질기다.

 

그래서 나의 위치를 다시 봐야한다.  23절에는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라고 말씀하셨는데, 24절은 ‘이 그릇은 우리니’라고 말씀한다!  , 그렇지, ‘이제’ 나의 위치는 하나님께 속했지!  은혜로 구원받았지!  다시 깨닫고 감사하게 된다.  더우기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고 말씀하며 나는 특별히 택하셨던 유대인도 아니었지만 이제 은혜를 입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위치를 얻은 자임을 다시 보게 하신다.

 

22절에는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준비된’ 이라는 말은 ‘카테르티조’라는 단어로 ‘고치다 만들다 적합하게 하다 정리하다 맞추다 완성하다’의 뜻이다. 즉 ‘멸하기에 적합하게 만든 그릇’ 이고, 이는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하는 도구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오늘 예를 든 애굽의 바로, 그리고 가룟 유다 등의 인물이 생각난다.  하지만 시간의 제약을 받는 인생은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바로’가 보이고 ‘가룟 유다’가 주님을 판 인물임을 알게 된다.  ‘멸하기에 적합하게 만든 그릇’이 우리의 소관이나 논쟁 거리가 아님이 분명하다. 

 

그와는 반대로 23절에는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이라는 구절로 대조가 되는데, ‘예비하신’ 이라는 말은 ‘프로에토이마조’라는 단어로 ‘미리 준비하다’라는 의미다.  ‘이제는’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으로 변함 받은 우리 자신을 보고 주님 앞에 감사할 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예비하심 혹은 예정하심은 인간이 하나님을 비판하는 논쟁거리가 아니라 믿는 이들이 겸손하게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하는 진리이다.

 

주님,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기 원합니다.  긍휼로 말미암아 영광으로 들어가는 그릇으로 만드신 그 부분을 붙잡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