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의는 왜 행위를 바탕으로 한 의보다 더 고상한 걸까? 아니, 행위로는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바울이 이제까지 계속 설명했고, 오늘 말씀에는 구약 말씀 여럿을 인용하며 다시 한번 믿음에 의한 의를 설명하는데, 기본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기질은 ‘행위’를 중시하고 보이지 않은 믿음에 대해서는 별로 크레딧을 주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부딪칠 돌에 부딪’친다 (32절).
생각해보면 믿음이 훨씬 관념적인 것 같지만 사실 행위를 바탕으로 한 의가 더 관념적이다. 관념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인격체로 섬기지 않고 관념적으로만 이해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관념적으로 대하는 결과가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함 혹은 인정을 받으려는, 행위를 기본으로 한 의를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믿음은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던 사람들 조차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랑받지 않던 이들을 사랑받게 만드는 관계의 회복으로 이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로가 신뢰없이 무언가 행함으로 관계를 쌓아가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고 오히려 오해를 살 수도 있다. 전혀 내가 바라지 않는 행위를 내가 바라는 것으로 오해하고 무던히 애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신뢰가 확립이 되면 실수 정도는 이해하고 덮어준다. 신뢰 혹은 믿음은 없는 관계는 시작하게 하고 깨진 관계는 회복시킨다.
29절에 큰 울림이 있는데,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한다. 이사야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악한지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셨던 것 처럼 동일한 멸망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백성임을 말씀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 정도 였으니 이방인은 정말 말할 필요 없이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개'들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에 의한 의는 우리를 하나님께 이끌고 하나님을 우리의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한다.
주님, 항상 실수가 많은 관계의 문제 속에 서로의 신뢰가 회복되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기에, 저도 관계 안에서 먼저 손 내밀 수 있는 은혜의 풍성함이 제 안에 이미 있음을 보게 하소서. 이러한 모든 진리가 관념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저의 삶 속에서, 먼저 하나님을 저의 마음에 모시며 섬기게 도와주시고, 오늘 하루 사랑하는 가족과 다락방과 신앙의 공동체 그리고 일가 친척은 물론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되게 하소서.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같던 저에게 먼저 손 내미시고 이 사귐 안으로 초청하심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