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을 직역하면, ‘형제들아 내 마음의 기쁨과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을 향한 간구는 구원 안으로 이다’ 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주님처럼 복음 때문에 자신의 백성에게 배척받았지만 그들이 멸망하기 바라지 않고 구원받기를 원했다. 2절 말씀처럼 바울 역시 한 때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지만 지식 (에피그노시스)을 따른 것이 아니었다. 교회를 핍박하는 자신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생각했었지만 오히려 주님을 ‘박해하’는 것이었고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자신에게 고생이라는 주님의 음성을 (행26:14) 들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대해 더욱 안타까웠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데 (4절), ‘마침’이라는 단어는 ‘완성’을 의미한다. 즉 율법은 그리스도가 없다면 불완전하고 의미가 없는 것이다. 만일 율법이 완전한 것이었다면 그리스도 혹은 메시야가 필요 없고, 그에 대해 그렇게 계속 예언할 이유가 없다. 율법으로도 충분히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기에 율법의 완성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
5-7절은 “모세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 기록했지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야할 것인가 라고 말할 (에이폰) 수 없다’ 라고 말하고 (레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끌어내리려는 것이다. 혹은 ‘누가 깊음 (아부소스, 무저갱, 지옥) 에 내려가야할 것인가’ (라고도 말할 수 없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끌어올리려는 것이다.” 라고 한다. 이게 대체 무슨 말씀일까?
이 부분은 신명기 30장 일부와 비슷한데, 12-14절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고 기록한다.
그런데 행할 수 있다고? 더우기 앞 11절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고 말씀한다. 하지만 이제까지 율법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에 따른 의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여기서의 핵심은 바로 ‘마음’이다. 신명기 30:14절에도 ‘네 마음에 있은즉’ 이라고 했지만, 오늘 롬 10장 6, 9, 10절에도 ‘마음’이 나온다. 율법을 지키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고 복잡하고 우리의 능력으로는 불가능 하지만 ‘마음’만 있으면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닐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마음’이 없다. 있다해도 우리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 (렘 17:9)’ 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영’과 ‘새 마음’ ‘부드러운 마음’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겔 36:26).
그렇기 때문에 부패한 마음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지만, 이것을 믿지 않기에 어떻게 사람이 승천할 수 있는가 하고 그리스도의 승천을 부인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옥에도 다녀오셨는데, 이것을 믿지 않기에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도 부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회개함으로 새 마음을 받아서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가진 이들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10절, 직역하면 ‘마음에 믿고 있는 것은 의 안으로, 그리고 입으로 함께말하는 (즉 마음과 동의하는) 것은 구원 안으로).
9절과 13절의 시제는 미래형이다. 즉 ‘구원을 받고 있게 될 것이다’ 인데, 이것은 구원의 문제가 구속과 달리 우리 삶 속에서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한다. 그래서 이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얻는’ 문제는 주님을 처음 믿을 때 부르는 것 (행 22:16)으로 시작해서 그 후에도 항상 불러야 하는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주님을 부르고 있는 (현재형) 모든 이들 안으로 주님은 부요하’시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자주 사망의 느낌이 몰려온다. 큰 돈은 아니지만 돈을 지혜롭게 쓰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할 때도 있고, 사랑하는 가족과 언쟁을 벌인 일도 나를 괴롭히고, 밤새 잠을 잘 못 자서 그런지 아무튼 아침은 육체적으로도 피곤하다. 더우기 막히는 도로에서 운전을 하다보면 짜증이 난다.
하지만 그 때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주여, 주 예수여~ 예수니~임~~ 주여어~~~’ 라고 계속 부르고 주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면 나의 마음에 변화가 오고 침착해진다. 그의 부요하심과 평안하심이 나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매일 해야 하는 것이고, 매 순간 주님의 구원을 경험하여 나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
주님, 예수님~!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주님의 그 부요하심을 누릴 때까지, 내 안에 주님의 임재로 채워질 때까지 계속 부릅니다. 바쁜 생활에 그렇게 부를 시간이 없다고 가끔 핑계를 대기도 하지만 그 바쁜 시간 중에 다른 것은 또 다하는 저희들을 봅니다. 나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감사하며 기도할 때 나의 생각과 마음을 지키심을 또한 감사합니다. 주님은 부요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