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생활을 하면서 가끔 나의 정체성에 도전을 주는 일들이 발생한다.  이러한 도전들은 외부에서도 오지만 내 안에서부터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의심은 믿음의 반대인데, 그러한 의심들을 해결할 때 오히려 더 큰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 변증적 방법이나 이성적 사고로 믿음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포스트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를 살아가는 이 세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믿음의 신비로운 면을 생각해 보면 우선은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계속해서 듣는 것이 우선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면으로 믿음은 고집일 수 있다.  하지만 이 고집은 자신만의 아집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한 확신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오늘 말씀 17절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는데, 킹제임스를 제외한 거의 모든 영번역이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번역했는데, 헬라어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 레마토스 떼우’로 되어 있다.  아마 다른 어떤 사본에서 그리스도를 부각시키려고 ‘하나님의 레마’ 대신 ‘그리스도의 레마’라고 번역한 것 같지만, 만일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구약의 말씀은 믿음과 상관없는 것이 된다.  구약 전체가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고 믿을 때, 이 구절은 굳이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번역될 필요가 없다.  특히 18-21절을 보면 더욱 그렇다.

 

아무튼 성경 말씀을 계속 읽으면 그 말씀이 내 생각과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되는데, 때를 따라 그 말씀들이 생각나고 이는 나에게 레마로 다가온다.  기록된 ‘로고스’가 내 생각과 마음에 각인될 때 이제 ‘레마’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주관적이다.  마치 지난 1:17에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라고 말씀한 것 처럼, 처음 믿음은 로고스에 기반을 두었지만 이제는 내 안에서 각인되고 자라서 레마의 믿음이 되었다.  (이렇게 설명하는 분들이 있나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가 이해하고 체험한 것으로는 그렇다.  전에 ‘레마’라는 '이단'이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그들을 만난 적도 없고 요즘은 너무 이단 시비가 많아서 그들이 정말 이단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제 13절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했는데, 구약 요엘서 2:32를 인용한 말씀이지만, 이 ‘주의 이름’이 과거 ‘야웨 (야훼? 여호와?  야후아?  이후아?) 혹은 아도나이’에서 이제는 ‘예수’ 즉 ‘구원하시는 여호와’로 더 구체적인 이름을 주셨다.  오늘 말씀 14-15절을 거꾸로 하면 ‘좋은 소식’ 즉 복음을 전하는 발들이 있는데, 이들은 먼저 ‘보내심’을 받아야 하고, 보내심을 받으면 ‘전파’하는데, 전파할 때 ‘듣게’ 되고, 들을 때 드디어 ‘믿게’된다.  그런데 믿는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 믿음의 확증은 결과적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많은 경우 ‘4영리’나 여러 전도지를 가지고 전도를 하게 되면 소위 ‘영접 기도’를 하고 마치게 되는데, 보다 성경적인 방법은 ‘부르게’ 하는 것이다.  영접 기도를 하고 나서도 사실 믿었는지 잘 모를 때가 많다.  그냥 따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르게’ 시켜보면 정말 믿었는지 아닌지 확인이 분명히 된다.  믿을 때 부르기 때문이다.  부르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정말 살아계시고 나의 부르는 소리를 들으시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믿을 때 부른다.

 

주님,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그냥 비유적으로 이해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주님은 살아계시고 나의 부르는 소리를 들으시는 나의 주인이십니다.  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비밀이 우리 가운데 회복되고 부흥되게 하소서.  그냥 기도 시작 전에 ‘주여 3창’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 순간순간 마다 주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 말씀을 통한 나의 믿음을 고백하게 하소서.  주여!  주 예수여!  아멘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