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언급했던 ‘디아코노스’ 즉 ‘집사’라는 단어가 오늘도 1절에 ‘일꾼’이라는 단어로 나오는데, 많은 경우 ‘집사’는 남자이고, 특히 바울은 딤전 3:12에 집사의 자격에 대해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 즉 남자임을 간접적으로 제시했지만, 로마에 천거하는 이 ‘일꾼’ 집사는 뵈뵈라는 ‘자매’ 즉 여자였다.  로마가 당대 문화의 집결지였지만 아무래도 여자의 사회적 신분은 상대적으로 낮았으리라고 보는데, 로마도 아닌 겐그리아 출신의 자매에 대한 천거를 서신 마지막 문안 부분에서 가장 먼저하면서 그를 ‘집사’로 인정한다.

 

뵈뵈는 바울의 사역에 매우 큰 도움을 주었던 것 같은데, 바울은 2절에 계속해서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을 말한다.  이러한 내용은 소위 ‘정통’ ‘명분’ 등을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도전을 준다.  주 안에서 열심으로 주님과 교회를 섬기는 일꾼은 이미 ‘집사’임이 증명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는 (10)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상대적으로 이름만 ‘집사’이고 일꾼으로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면 유명무실한 것이 된다.  이것은 다른 직분도 마찬가지이다.

 

로마서 마지막 장에 와서 로마서를 다시 한번 돌아보며 한번 더 훑어본다.  전반부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을 소개하고, 인간타락의 실존,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선한 것이지만 그것을 지키는 것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 등을 말했다.  소위 ‘이신칭의’ 라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별로 잘된 번역이 아닌 문제를 언급하는데, ‘칭의’가 아니라 완전한 ‘정의 (의를 정하다)’ 혹은 ‘의화 (의롭게 된다)’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보통 로마서의 주제가 소위 이 ‘이신칭의’로 생각할 때가 많지만, 이는 3장과 5장 즉 로마서 전체로 보면 겨우 앞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로마서는 그보다 더 높고 풍성하다.  구원이 단지 ‘구속 redemption’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의롭게 됨 justification’과 ‘성화’를 거쳐 궁극적으로 ‘영화롭게 됨’이 온전한 구원임을 말씀한다.  그래서 로마서는 7장 혹은 8 1절로 끝나지 않고 그 두배로 늘어나서 16장까지 오게 되는데, 반드시 이해하고 기억해야 할 문제가 둘이 있다.  하나는 ‘행함’과 ‘믿음’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영’과 삶을 통한 ‘예배’이다.

 

로마서 첫부분에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함을 계속해서 말하기 때문에 마치 믿음과 행함은 관계가 없는 것 처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로마서 후반에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오히려 율법을 지키는 것 보다 더 힘든 명령들이 등장한다.  12장부터 계속해서 ‘하라’ ‘말라’ 등의 명령이 즐비하게 나오는데, 그 내용은 아예 율법을 지키는 것이 더 편할 것 같다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이것은 왜 그런가?

 

믿음은 ‘관념’의 문제가 아니라 실행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율법을 나의 힘으로 지켜보려는 시도는 교만을 드러내고 실패를 경험하게 하며 은혜로 부터 멀어지게 하지만, 주님을 믿을 때 나의 힘이 아닌 ‘그 영’ 안에서 이러한 명령을 따라 살 수 있는 마음과 생명과 능력을 공급받으며, 그리스도의 몸의 공동체적 도우심이 시작된다.  에베소서에서도 계속 믿음을 강조한 바울은 살전 1:3에는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라고 말씀하는데, ‘믿음의 역사’에서 ‘역사’라는 말은 ‘행함’과 동일한 단어인 ‘에르곤’이다.  믿음과 행함은 항상 같이 간다!

 

‘삶을 통한 예배’는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데, 오늘 마지막 장 16장이 바로 그 절정이 된다.  단지 문안으로만 이해한다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지만, 이러한 문안 안에 성도의 교제와 교통이 있고, 그 안에 생명의 흐름이 있으며 또한 참된 예배가 있다.  열거된 여러 이름들은 그 배경과 출신과 상태가 모두 다르지만 주 안에서 한 몸으로 세우심 받은 형제들이다.  이러한 이들에게 문안하는 것은 단지 인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섞여지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예배이다.  그래서 이 16장이 필요하다.

 

주님, 믿는다고 하면서 몸을 움직이기 싫어한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문안하라는 말은 명령임을 봅니다.  나와 전혀 다른 문화와 생각과 견해를 가졌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공유했다면 그들에게 문안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섞여지는 것이 주님 앞에 참된 예배임을 배웁니다.  내가 없어져야 하겠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드러나셔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은 즐거운 것이지만 동시에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임을 다시 깨닫습니다.  믿음의 역사, 행함을 다시 한번 보게 하소서.  그 영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는 하루 되도록 인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