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계속 ‘문안하라’고 명령한 바울은 오늘 17절에는 ‘떠나라’고 말씀한다. 그 대상은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이며 먼저 이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말씀한다.
이 ‘떠나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엨클리노’인데, ‘밖’을 의미하는 ‘에크’와 ‘기울다’를 의미하는 ‘클리노, (영어 incline, recline 등)’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떠나라’는 의미보다는 ‘기울이지 말라, 굽지 말라’ 혹은 ‘돌아서라’ 등의 뜻이다. 특히 여기에서는 ‘권하노니’라는 말을 써서 그들이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완전히 배척하거나 떠나라는 말씀은 아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즉 언제라도 그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섬기게 된다면 다시 그들과 교제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해 이들은 하나님을 모르거나 배척하거나 관심없는 세상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예전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몰라서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하는' 이들일 수 있다. 그런이들은 그 이면에 ‘자기들의 배만 섬기’는 것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거나 혹은 '더러운 이를 탐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이런 이들이라도 아예 배척하고 떠나는 것에 대해서는 주의를 부탁한다. 그 이유는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이다 (23절, 27절 원어). 그래서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함이 필요하다.
21절에는 디모데를 ‘나의 동역자’라고 소개한다. 영적으로 아들인 (고전 4:17, 딤전 1:2) 디모데를 바울은 그의 동역자 즉 사역에 있어서는 전혀 수직관계가 아닌 함께 일하는 (순에르고스) 이로 인정한다. 요즘 담임목사와 부교역자 사이의 어려운 관계에 대해 얘기가 있는데, 성경에는 ‘부교역자’라는 말이 없다. 사역자면 동역자이다. 현실의 어려움을 논하지 말자. 현실에서 성경을 따르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가 필요하다. ‘평신도’라는 말이 성경에 없듯이 ‘부교역자’라는 말도 성경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로마서를 마치면서 바울은 다시 한번 ‘나의 복음’을 말하는데, 1장 1절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소개하며 이는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후에 이 복음은 ‘그 아들의 복음’ (1:9)이 되고 또 이어서 ‘나의 복음’ (2:16)이 된다. 15장 19절에는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고 이제 다시 16장 25절에는 다시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가 나온다.
하나님 즉 ‘호 떼우스’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거룩하신 분이고 그의 복음 역시 감추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로 인해 이제 계시되었고 (25, 26절) 이 복음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은혜로 체험할 때 이 복음은 ‘나의 복음’이 된다. 하나님 주신 '믿음으로' 내 마음에서 역사할 때 '믿음에 이르러' ‘나의 복음’이 되며 이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하고 형제들과 하나되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그의 영광에 이르게 한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할렐루야!
주님, 복음이 내 안에 살아있고, 주의 교회 안에 왕성히 활동하며 각 사람에게 ‘나의 복음’ 되기를 기도합니다. 부정한 것과 부정적인 것이 밀려오는 내 안을 이 복음으로 채우소서.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고, ‘그 영’으로 충만케 하소서. 주 예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