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장 13절과 14절은 전혀 상반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므로’라고 연결된다. 그래서 혹시 사본 중간에 다른 내용이 혹시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어떻게 정말 되먹지 못한 백성들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시다가 ‘그러나’가 아니라 갑자기 ‘그러므로’ 라고 이어지는가? 여기에 고심하느라 어제 마음이 좀 상했다. 하지만 그러한 고심에는 나의 의가 숨어 있었다.
많은 때 우리는 (나는) 하나님에 대해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잘못했어도 ‘우리가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고(요 15:16, 19 살전 1:4 살후 2:13 엡 1:5), 우리가 회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해 놓고 우리로 돌아오라고 하신다 (사 44:2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에는 두 팔 벌려 우리를 초청하시는 모습이 보인다.
오늘 말씀에는 이러한 것이 분명히 나타나는데, 음녀 고멜을 값을 주고 사와서 (구속해서) 서로 신실함을 지키자고 호세아는 말한다 (3절). 여기에 고멜이 회개했다는 내용은 없다.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모습은 결코 찾을 수 없다. 재미있는 것은 헬라어 ‘회개’라는 말이 ‘메타노이아’, 그리고 ‘회개하다’는 ‘메타노에오’인데, ‘생각을 바꿈’ 혹은 ‘생각을 바꾸다’ 라는 의미이다. 여기에는 ‘가슴을 치며 참회’한다는 등의 의미가 없다. 단지 ‘생각을 바꾸다’라는 뜻이다.
눅 17:4에는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고 말씀하는데, 원어적으로 읽는다면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생각이 바뀌었다 (혹은 생각을 바꾸었다)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가 된다. 여기에는 ‘미안하다, 정말 잘못했다. 내가 나빴다’ 등의 용서를 구하는 말이 없다. 그냥 ‘생각이 바뀌었다’ 혹은 '생각을 바꿨다' 이다.
만일 조강지처를 버리고 바람피운 남자가 나중에 돌아와서 ‘생각이 바뀌었다’라고 하면 받아줄 아내가 있을까? 반대로 남편을 떠나 다른 남자들과 바람피운 아내가 돌아와 무릎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기는 커녕 ‘미안해요, 생각이 바뀌었어요’ 라고 하면 받아줄 남편이 있을까? 그럼에도 회개는 단지 ‘생각이 바뀌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러한 것이 참된 회개이기 위해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음 (마 3:8)이 있어야 한다.)
주님, 하루에도 수없이 생각으로 죄짓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나도 주 앞에 돌아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라고만 한다면 더 이상 묻지 않으시는 주님의 무조건적인 용서와 일방적인 사랑을 호세아를 통해 다시 봅니다. 주님의 이러한 은혜가 나를 좀 뻔뻔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지만, 주님의 은혜없으면 제가 아무것도 아니고, 주님 아니고는 돌아갈 곳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이미 다 이루신 구속하심과 주의 교회를 향해 일방적으로 흐르는 아가페를 통해 오늘 매 순간 주님께로 생각이 바뀌게 하시며, 또 서로에 대한 생각도 바뀌게 하소서. 오직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의 능력을 힘써 의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