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절은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고 하는데, 여러 역본에서 동일하게 번역했지만 가끔 ‘음행’을 10절과 연결한 번역본들이 눈에 띤다.  히브리 원어를 봐도 ‘음행’이 어디에 붙어있는지 잘 구별이 되지 않는다.  10절의 ‘여호와를 버리고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에 붙으면 ‘여호와를 버리고 따르지 아니한 음행이니라’고도 번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어는 잘 모르지만11절에서 ‘음행’을 뺀다면 ‘포도주와 포도즙이 마음을 빼앗는다’라고 할 수 있는데, 왕국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고난 다음에도 그럭저럭 살만했나보다.  가난하면 포도가 남을 수 없고 포도쥬스를 마시거나 더 익혀서 포도주로 만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먹고 살만한 상황이 아직은 이어지니 별 문제가 없게 느껴지고 고통이 없고 결국은 음행이 행해진다.

 

이번 달 초 키르기스스탄을 방문했을 때 큐티 나눔 시간에 현지 사역을 시작하신 ㅇ장로님께서 ‘시간 많고 돈 많으면 죄를 짓습니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인상적이다.  돈 좀 생기고 여유가 생기면 그만큼 주님을 더 잘 믿고 따를 것 같지만 많은 경우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포도쥬스와 포도주가 내게 있다는 것을 알면 하나님께 감사 드리고 더욱 그의 뜻을 좇는 것이 아니라 ‘음행’ 즉 하나님 외 다른 것에 눈을 돌리기 쉽다.  좀 더 자극적이고 좀 더 육감적인 것들을 추구하게 된다.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면 과거의 죄의 문제와 죄책감, 그리고 상처 등에서 치유받게 된다. 하지만 좀 더 깊은 부분을 만지기 위해 ‘내적치유’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는데, 참여자들은 자신들의 모든 문제에 대해 어떤 면으로 ‘완전한 치유’를 바라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이면에는 (물론 다는 아니겠지만) 지극히 이기적인 면이 숨겨있다는 것인데, 잘 판단하지 않으면 치유하시는 하나님 보다 ‘내적 치유’를 추구하는 영적 음행 혹은 우상 숭배에 빠질 수 있다.  결국 죄성으로 똘똘뭉친 우리들의 자아가 계속해서 상처를 긁고 또 만들어 내기 때문에 현실에서 ‘완전한 치유’는 가능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완전한 치유는 그 날 주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실 때 ( 7:17)이루어진다. 

 

사실 먹고 살기 힘들 때 이러한 심리적 치유라는 것에 눈을 돌릴 겨를이 있었는가?  따지고 보면 너무 먹고 살기 편하니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키르기스스탄에도 여러 사회 문제들이 있고 학생들에게도 많은 문제들과 상처들이 있지만, 상황이 열악하니 그런 것에 얽매이기 보다는 미래를 더 바라보게 되고, 그래서 생각들이 비교적 깊은 것 같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인의 심리적 치유가 아니라 관계의 회복이다.  물론 개인의 심리적 치유 없이 관계 회복이 쉽지는 않지만, 심리 치유가 목적이고 그것이 끝이라면 헛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과 고난은 영적으로 유익이 된다.  누가복음 6:20에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라고 말씀한다.  가난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지 않는다.  가난은 물질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한 마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가난의 부재의 문제와 더불어 ‘과거의 영광’의 문제에 대해서도 말씀하는데, 15절에는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라고 한다.  길갈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의 방황 생활을 끝내고 요단을 건너 처음으로 진지를 구축하고 각 지파마다 돌을 세워 기념한 영광스러운 곳이다.  벧아웬은 해설처럼 문자적으로 ‘죄악의 집’이지만 ‘벧엘’을 가리킨다.  과거 야곱이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던 꿈을 꾼 곳인데, 왜 벧엘이 ‘죄악의 집’이 되었는가?  과거의 영광이 그들에게는 우상 숭배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성전이 세워짐으로 그러한 과거의 것에서부터 해방되어야 했고 오직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했지만, 그 외 ‘다른 것’으로 눈을 돌림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과거의 영광도 그들에게는 음행의 대상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나 기독교 전체로나 과거의 믿음과 열정과 영광에 머무르는 것은 전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침체에 빠지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는 항상 새로우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 ( 7:6)을 말씀한다. 

 

현재 한국 기독교는 과거에 경험했던 가난의 부재와 동시에 과거의 영광에 연연하는 이중고를 경험하고 있고 이에 따라 많은 음행이 일어나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과거에 있던 열심, 과거에 경험했던 은혜, 과거의 승리 등을 아쉬워 하며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할 때가 많다.  과거에 경험했던 하나님은 현재의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된다.

 

주님, 영을 추구하려면 육이 그쳐야 함을 압니다.  물질의 곤함이 영적인 부함으로 이끔을 다시 보게 하소서 ( 2:5).  바리새인의 금식은 아니지만 나의 필요 이상 탐하는 그 어떤 것을 그치는 영성이 있기 원합니다.  오직 나의 추구는 진리와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되기 원합니다.  아울러 현재 여러 모양의 고난을 통과하며 '주여 어느때 까지이니까' 라고 탄식하는 형제 자매들이 있음을 압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상황을 안배하여 주소서.  힘과 소망 되소서.